한글을 만나다



조선시대, 왕도 은어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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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은어를 쓰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바로 '구분짓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자기들끼리의 줄임말과 신조어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도, 무의식의 밑바탕에는
'우리끼리 쓰는 우리만의 언어'로 자신들만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을 거에요.
이런 경향은 비단 요즘에만 있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현상이 똑같이 있었다고 하니 말이죠. 

조선시대 한글은 '언문'이라 불리며 '아랫 것들이나 쓰는 천한 말'로 분류되었는데요.
그런 밑바탕에는, 양반들의 이런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천 것들이 쓰는 말을 우리 양반들이 함께 쓸 수는 없지!"

조선시대 세종대왕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한글 창제에 관한 왕과 귀족간의 갈등을 그린 내용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언어를 만들려는 왕의 노력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의 암투…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정작 왕도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왕이 다른 나라 언어나 자신만 알아듣는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니구요.
아니, 따지고 보면 왕이 그 말을 사용한 것도 아니에요. 왕 주변의 신하와 내시 등이 왕에게 그 말을 사용한 것이죠.
중국에서 황금빛이 왕의 상징이며 왕만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처럼,
'왕'이라는 권력을 구분짓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그 당시의 말을 재연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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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를품은달' 포스터 (출처: www.imbc.com) 


"상감마마, 기침하셨나이까? 아침 수라 받으실 시간임을 아뢰옵니다. 먼저 용안을 씻고 수부수하옵소서."
"그래, 그 전에 비수가 조금 흐르니 나인은 수긴을 먼저 대령하라."
"금방 수긴 대령한 후 아침 수라 들라 하겠습니다."

왕이 먹는 식사를 '수라'(水刺)라고 하는 건 많이 들어보셨을 거에요.
'용안'(龍顔)도 임금의 얼굴을 나타내는 말이고… 그러나 '비수'와 '수부수', '수긴'은 좀 생소하죠?
'비수'(鼻水)는 한자 그대로, 왕의 콧물을 의미합니다. '수부수'는 그 어원은 알 수 없지만,
'연산군일기'를 보면 연산군이 봉상사의 스님에게 '수부수하는 나무를 만들어 바치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합니다.
네! 수부수가 바로 양치질을 뜻하는 말이죠. '수긴'(手巾)은 오타가 아닌, 왕의 수건을 말하는 한자어랍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왕이라는 존재를 높이기 위해서 왕을 위한 단어들을 만들어 썼답니다.
'상후(上候) 미령(靡寧)하시다'는 말은 왕의 몸이 좋지 않을 때 쓰는 말이고,
'말씀드리다', '모시다' 등의 말도 '아뢰옵다', '뫼옵다' 등의 극존칭을 만들어 사용했답니다.
음식 재료인 쇠고기나 고추, 달걀, 마늘 등도 각각 '황육'(黃肉), '번초'(蕃椒), '계단'(鷄蛋), '대산'(大蒜)이라는 말을
사용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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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깊은 나무' 스틸컷 (출처: tv.sbs.co.kr)

왕이 쓰던 말은 현대에 이르러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혹은 그 뜻이 바뀌어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음에 끌리지 않다'는 뜻으로 왕이 사용하던 말인 '아니꼽다'는 지금도 같은 뜻으로 많이 쓰죠.
'미안하다'는 말 역시 조선시대 왕이 쓰는 말이었지만, 뜻은 좀 달랐어요. '짐이 영의정에게 미안한 일이 좀 있네' 하면,
영의정에게 왕이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영의정에게 서운한게 좀 있다'는 뜻이 된답니다.
왕에게 드리는 축문인 '치사'(致詞) 역시, '거짓으로 아부를 남발한다'는 '공치사'라는 단어 속에 남아 있답니다. 

'말'이란 것은 서로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어울리는 말들은 따로 있겠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못알아듣는 '왕 전용 용어' 같은 말은,
오히려 세대간의 소통과 화합을 해치는 말이니 그다지 언어적으로 좋다고는 할 수 없겠죠.

그러나 현대에도 그런 특별한 말을 사용해 자신의 처지를 높이려는 무의식적인 행동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수시로 사용하는 외래어와 한자어가 바로 그런 것 중 하나죠.
'소통과 평등'을 이야기 하는 우리 세대에서 이런 문제는 꼭 한번 생각해 봐야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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