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을 만나다



'묵상하는 캘리그래피 거장' 오기노 탄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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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캘리그래피계의 거장이라 불리는 오기노 탄세츠(萩野丹雪). 
1939년생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서도를 배웠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의 첫 커리어는 캘리그래피가 아니라 디자인이었습니다. 

스물두 살 때 그래픽디자이너로서 첫 발을 내딛었고, 이후 10년간 디자인 일을
계속해오다 서른세 살 되던 해인 1972년, 본격적인 캘리그래피 공부를 시작한 것이죠.
서도가 사카키 바쿠잔(榊莫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는군요.
(사카키 바쿠잔은 2010년 10월에 향년 84세를 일기로 타계했습니다.)

디자이너에서 캘리그래퍼로의 길을 걷게 된 오기노 탄세츠는,
주류 브랜드 '산토리'의 상품 디자인, <신선조>와 <아스카> 같은
NHK 드라마들의 타이틀 디자인 등 수많은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표현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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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타이틀, 각종 주류 패키지에 사용된 오기노 탄세츠의 캘리그래피


그는 일본상업서도작가협회(JCCA)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자신의 캘리그래피 철학을 
많은 이들과 공유해왔는데요. 지난 2008년 11월 7일에는 우리나라 예술의전당에서도 세미나를 진행했죠. 
한국캘리그래피협회와 윤디자인연구소가 공동 주관한 초청 세미나였습니다. 오기노 탄세츠는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일본 캘리그래피의 특징과 현황을 소개했습니다. 직접 작품 시연을 펼쳐 보이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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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미나에서 강연과 작품 시연을 펼친 오기노 탄세츠


당시 오기노 탄세츠가 들려주었던 상업 서도와 예술 서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캘리그래피 철학은 2년여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흥미롭게 다가오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그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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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시연 당시 오기노 탄세츠가 사용한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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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도는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것이었다.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가 
30대 중반에 서도가로서 본격적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디자인 작업에 있어 헤드라인 같은 부분은 
서도가들이 맡아서 했다. 그들의 작업을 보면서 내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들어서 서도가로 나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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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가독성을 꼽고 싶다. 간혹 지나치게 멋을 부려 단번에 읽어내기 어려운
글씨들을 보는데, 
성공적인 결과물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로는, 글씨 안에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이는 곧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움을 살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깊은 맛을 낼 수 있는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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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서도의 경우, ‘훌륭한 디자인 서도의 요건’들과 그 순위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디자인 서도에서 가장 비중 있는 것은 가독성인 점과 달리, 예술 서도의 중요한 점은 ‘임팩트’이다.
작품의 깊이와 강약, 품격 등 보는 이의 시선을 끌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적 힘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예술 서도는 디자인 서도와 마찬가지로 목적에 부합되는 내용을 갖춰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 가독성에 대해 고려해볼 일이다.
결론적으로, 디자인 서도가 클라이언트나 소비자 등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우선시한다면,
예술 서도는 작가 자신에 대한 탐구로 빚어지는 작품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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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사용되지는 않지만 일본어에 묵상가라는 용어가 있긴 하다.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하려는 이유는, 내 작업들이 디자인 서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추상예술 서도에도 접근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작품 활동을 보다 넓은 의미로 
표현해주는 말인 것 같아서 묵상가라는 용어로 스스로를 칭하고 있다. 
그리고 추상 서도를 꾸준히 하는 까닭은, 디자인 서도처럼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맞춰야 하는
한계 없이 내 나름의 세계를 마음껏 보여줄 수 있다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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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캘리그래피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한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은 기하학적이고 심플하며,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조형성을 가진 문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한글의 특징들이 캘리그래피 작업에서는 자칫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한자의 경우 획이 복잡한 듯해도 나름대로 리듬감을 가지고 있다. 이를 잘 활용하면 글자에 다양한 표정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한글은 그렇지 않다. 이런 한계를 바로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한국의 캘리그래피도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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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헤드라인에 사용된 캘리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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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적인 대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기계가 아닌 인간의 손으로 줄 수 있는 감동이 어디까지인지를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일본 서도에 대한 이해의 다리를 놓는 한편, 한국 캘리그래피계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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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쓰는 붓은 물론이고, 룰러나 이쑤시개, 젓가락 등 다양한 재료들을 필기도구로 활용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엔 맨손에 직접 먹을 묻혀 쓰기도 한다. 이렇게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이유는 ‘오기노’라는 브랜드의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누구나 하는 작업은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지양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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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노 탄세츠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어넣어준다는 추상 서도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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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철학이라 할 것은 없다. 서도의 길이란 글자 그대로 ‘문자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갈고닦는 길’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작업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다만,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스타일은 붓의 부드러운 놀림보다는
힘과 느낌을 살리는 작업이다. 그리고 어떤 작업을 하든 나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조형미를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 이 글은 2008년 11월 7일 열린 오기노 탄세츠 초청 세미나 당시,
오치규 충남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가 진행했던 인터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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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마지막의 한글이 가지는 특징으로 인해 오히려 캘리그라피나 타이포 작업에 있어서 어려움이 생기는 부분은 정말 너무도 깊이 느껴지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한글을 가지고 오래도록 작업을 하신 금요비작가 분과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도 똑같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있네요~~
    2012.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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