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디자이너 임이랑2020.04.08




그래픽디자이너 임이랑은 1인 스튜디오 PHENOMENA를 운영한다. 직함은 아트디렉터다. 프리랜서로 활동하다 스튜디오를 꾸린 지 1년째다. 프리랜스 디자이너 임이랑, PHENOMENA 아트디렉터 임이랑은 똑같은 사람이다. 한데 비즈니스 영역에선 다르다고 한다. “똑같이 1인이라 해도 (···) 온도 차가 있더라고요.” 임이랑의 말이다. 클라이언트들과 소통할 때, 개인보다는 스튜디오 소속일 때 더 전문성이 피력되는 것 같다는 체험담이기도 하다.

단어 ‘온도 차’를 사전에서 찾으면 ‘최고 온도와 최저 온도의 차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젊은 디자이너 임이랑은 이미 현업 세계의 최고 온도, 최저 온도를 맛본 건지도 모르겠다. 클라이언트잡 과정에서 겪은 온도 차들은 스튜디오 한곳에 차곡차곡 쌓였을 것이다. 나날의 일교차였던 것들은 1년간 모여 PHENOMENA의 연교차로 기록돼 있을 터다. 일교차·연교차가 축적될수록 미래의 기온을 예측하기 수월해진다. 디자이너로서 마주해야 할 향후 기상 현상(meteorological phenomena)에 대해서도, 임이랑은 어느 정도 예비해두고 있나 보다. “5년이 순탄하지 않게 흘러갔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면.

임이랑의 자기다움은 색깔이 아닌 온도로부터 나오는 듯하다. 외부 자극을 받아내면서도 고체온(분노)-저체온(좌절)을 오르내리지 않는 건강한 자기 온도. 이러한 디자이너로서의 기초 체온(체력이 아니다)을 임이랑은 가꾸고 있다. 이랑의 온도가 곧 PHENOMENA다.

인터뷰 _ 에디터 임재훈
director@typographyseoul.com



PHENOMENA 워크웨어


『타이포그래피 서울』 독자 여러분을 위해 임이랑 작가님과 스튜디오 PHENOMENA에 대해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PHENOMENA의 아트디렉터 임이랑입니다. 스튜디오는 2019년부터 운영하고 있어요. 그전에는 프리랜서로 2년 정도 활동했습니다. 스튜디오를 차릴 결심이 든 건 프리랜서의 한계를 느낀 후였어요. 똑같이 1인이라 해도 스튜디오로 소개되는 것과 개인으로 소개되는 것에 온도 차가 있더라고요. 일단 수요층이 다르고,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범위도 다른 게 가장 컸어요. 당연할 수 있겠지만,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개인보다 스튜디오 쪽이 더 전문성이 있다는 인상을 갖는 듯해요.

   PHENOMENA는 ‘현상’이라는 뜻이에요.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그나마 간단하고 중립적인 스튜디오명을 고른 거예요. 더 솔직히 말하자면, 스튜디오를 꾸릴 당시 어떻게 만들고 싶다는 그림이 뚜렷하지 않아서였던 것 같아요. 이름이 주는 제약이라는 게 존재하기도 해서 최대한 중립적 네이밍을 한 겁니다.

   ‘현상’의 사전적 뜻은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모양과 상태’라고 해요. 그래픽디자이너로서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적절한 시각 언어로써 개념 또는 직관을 감각할 수 있는 자극 내지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하나의 스튜디오를 설명하기엔 건조한 타이틀일지 모르겠지만, 차차 성장해나가면서 좀더 뚜렷한 저만의 색깔과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스튜디오 운영 1년차군요. PHENOMENA의 원년은 어땠고, 앞으로 어떻게 성장시키고 싶으세요?

   첫해는 정신없이 흘러갔어요. 1인 스튜디오로서, 그리고 디자이너 임이랑으로서의 정체성에 경계가 분명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다소 아쉽게 느껴집니다. 1년간 진행했던 프로젝트로는 우선 Xidozu, whole paper, Oyster Seoul 등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이 있네요. 대부분 자신만의 브랜드를 새롭게 시작하는 주변의 패션 디자이너, 영상 디자이너를 위한 프로젝트였어요. 다들 또래고 출발선이 비슷하다 보니 응원하는 마음 반, 같이 성장해나간다는 마음 반으로 즐겁게 진행했던 것 같아요.


의류 브랜드 Xidozu 로고 디자인(패션디자인: 신동주)

   PHENOMENA가 생기기 전인 2018년부터 스튜디오 Lift-off의 이진우, Now we rise의 정길웅 디자이너와 함께 All That Glitters라는 마켓 프로젝트(이하 ATG)를 진행해왔어요. 작년에는 ATG의 네 번째 오프라인 마켓을 기획하고 스튜디오 로고를 찍은 티셔츠를 팔았습니다. 전시로는 전주국제영화제 특별 기획전 〈100필름 100포스터〉, 〈2019 타이포잔치: 제6회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이하 ‘2019 타이포잔치’)의 ‘다면체’ 섹션, 그리고 제2회 〈대강포스터제〉에 각각 작가로 참여했어요. 지금은 동화약품 가송재단에서 주관하는 〈2020 가송예술상〉의 전시 아이덴티티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는 스튜디오 영역이 좀더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2018 All That Glitters Market 포스터(공동 작업: 이진우)


2019 전주국제영화제 '100필름 100포스터' 참여작 '다행이네요'


PHENOMENA의, 혹은 디자이너 임이랑의 ‘현재 시점에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작업들이 궁금해요.

   가장 최근에 한 whole paper 브랜드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를 먼저 뽑고 싶네요. whole paper는 현재 런칭 준비 중인 컨템퍼러리 패션 브랜드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기획 단계부터 제약이 있었어요. 클라이언트가 타입디자인 에이전시 Dinamo의 Whyte Inktrap이라는 서체를 로고타입으로 정해놓고 시작했거든요. 아마도 이 서체 특유의 시각적 요소, 그러니까 잉크트랩 형태에 크게 매료된 것 같았어요.

   첫 제안을 듣고 저는 클라이언트의 원하는 바가 너무 명료해 디자이너로서 별로 손댈 부분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클라이언트가 좀더 정제되고 중도적인 느낌을 바란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Whyte Inktrap의 디테일을 수정하기로 했죠. 라운딩 형태이던 기존의 잉크트랩을 모두 직선으로 교체하고, W의 잉크트랩은 사선으로 꺾어 형태적 통일성과 시각적 재미를 더했습니다. 타입디자인은 딱히 자신 있는 편이 아니어서 확신이 들 때까지 수정을 반복했습니다. 다행히 클라이언트도 저도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어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얻은 형태가 데이터로 완성된 걸 보니 뿌듯했습니다. 이 작업을 계기로 타입 다루는 방식이 더 유연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이 프로젝트가 흥미로웠던 이유입니다.



의류 브랜드 whole paper 아이덴티티 디자인

   또 하나 대표작으로 꼽고 싶은 것은 2018년 제1회 〈대강포스터제〉 참여작 ‘넥타이’예요. 2012년 제36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신문수 님의 동명 곡을 해석한 작업입니다. 가사가 참 직설적이고 명료한 노래였어요.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러니가 있죠. “거리엔 수많은 나의 또래들 / 보다 나은 내일 위해 / 치열한 일상으로 가는 버스를 타 / 이 순환 노선에 언젠가 어딘가에 있을 / 오색 넥타일 찾아”. 저는 이 아이러니를 시각화하고 싶었어요. 젊고 순진한 이들이 예쁜 넥타이를 매기 위해 앞으로만 나아가다가 껍데기인 넥타이만 오롯이 남아버리는 상황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지나치게 설명적이기보다는 직관적으로 와 닿는 이미지를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미지를 운용할 때 저는 스톡 이미지보다 직접 찍은 것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운 좋게도 아카이브 해둔 사진 중 ‘넥타이’의 주제를 명료히 표현해줄 만한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물고기 떼와 그 화려한 색감이 노랫말의 의미를 다 담고 있는 듯했어요. 물고기의 목을 길게 늘여 마치 오색 넥타이처럼 보이게 가공했습니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1대1 대응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자칫 유치할 수도 있지만, 의미적으로는 연결이 명료하게 이루어진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포스터를 본 관객들이 처음엔 이미지와 텍스처에 호기심을 갖고 접근했다가, 가사와 연결 지어서 천천히 뜯어본 뒤에 의미를 깨닫는 것이 재미있었고, 노래의 문법을 성공적으로 시각화한 것 같아 만족스러웠습니다.


제1회 〈대강포스터제〉 참여작 '넥타이'


그러고 보니 〈대강포스터제〉 기획단 멤버죠? 관람객 입장에서 정말 궁금했던 게 있습니다. 매년 디자이너(참여 작가) 50~70명을 모으고 전시 진행을 하고 마켓까지 운영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닐 텐데 현업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기획단이 어떻게 다 소화해내는 걸까, 라는 것이었어요. 올해 제3회 행사를 기대하면서, 작가님에게 직접 답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대강포스터제〉의 경우 기획단 업무가 워낙 잘게 나뉘어 있어서 제가 포괄적인 답변을 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부분만 최대한 자세히 알려드리지요.

   디자이너 섭외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그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자기 검열만 있었죠. 우선 기획단 주변에서 행사와 결이 맞는 디자이너를 1차로 섭외하고, 2차로 그들의 추천 또는 SNS나 입소문으로 신진 디자이너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점점 가지가 뻗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라인업이 구성됐고요.

   마켓 같은 경우는 1회 행사에서만 진행했어요. 에디터님도 아시겠지만 〈대강포스터제〉 기획단 중에는 아까 ATG를 얘기할 때 언급한 정길웅, 이진우 디자이너도 있습니다. 제가 기획단에 참여한 계기가 ATG 운영진이었기 때문이기도 해요. 첫 행사다 보니 다들 구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양함을 더할 콘텐츠로서 마켓이 하나의 역할을 해주리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는 제2회 ATG 마켓을 〈대강포스터제〉 콘셉트에 맞춰 진행하기로 했고, 주제는 ‘Glitters of youth’라고 설정했습니다. 즉, 제2회 ATG 마켓이 제1회 〈대강포스터제〉 마켓이었던 셈입니다. 24팀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해 각자의 작업들을 가져왔습니다. 뉴 레트로 감성을 가진 굿즈가 많아서 전시 콘셉트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죠. 제2회 〈대강포스터제〉부터는 마켓 운영 대신 기획단으로서 전시 굿즈를 디자인·제작하는 방향에 더 집중했습니다.


2018 All That Glitters Market 굿즈 ‘LAGGARD’

   현업 디자이너들이 틈틈이 시간을 쪼개 기획한 행사가 무사히 진행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봐요. 하나는 서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맡아서 한 것, 다른 하나는 협업이죠. 한 사람이 한 부분을 온전히 맡아 끝내는 경우도 있지만, A가 디자인한 것을 보고 B가 교정을 봐주거나 릴레이처럼 이어받아 진행하는 경우도 꽤 있었어요. 시너지가 큰 일이었습니다. 물론 커뮤니케이션 문제가 생길 때도 많았지만 그런 건 협업의 부산물 같은 거죠.

   제3회 〈대강포스터제〉의 올해 진행 여부는 저도 모르겠네요. 기획단 멤버들과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업과 전시를 병행하다 보니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고요. 지난해 행사 때는 전시 끝나고 다들 상당히 지쳐 있었어요. 비엔날레처럼 2년에 한 번씩 하자고 농담처럼 말했던 기억이 있네요. 뭔가 확정되면 소식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타이포그래피 서울』과도 인연이 있는 Now we rise 정길웅 작가님을 비롯해 여러 동료 디자이너들과 다양한 활동을 하시는 걸로 압니다. 방금 얘기한 〈대강포스터제〉도 그중 하나일지 모르겠네요. 그동안 진행했던 협업 프로젝트들, 또는 현재 참여 중인 프로젝트 얘기 좀 들려주세요.

   협업 프로젝트 중 가장 메인은 ATG가 아닐까 싶어요. ATG는 이진우 디자이너의 제안으로 2018년 여름에 시작한 프로젝트예요. ‘오프라인 마켓을 기반으로 한, 생산자로서의 디자이너를 위한 플랫폼’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첫 시작은 2018년 여름 연남동 작업실에서, 그해 가을에는 〈대강포스터제〉와 연계해 부천 아트벙커 B39에서, 겨울엔 편집샵 키오스크키오스크(KioskKiosk)에서 크리스마스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로 진행했어요. 그리고 작년 여름에 또 연남동 작업실에서 ‘READY-TO-WORK: HEATWAVE WARNING’라는 이름으로 진행했죠.

   ATG가 기본적으로 마켓이긴 하지만, 수익성을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건 아닙니다. 콘셉트가 얼마나 흥미로운지, 우리가 얼마나 즐기면서 할 수 있는지가 늘 수익성보다 앞선 이슈였어요. 매번 다른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고안하고, 흡족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여러 방식을 시도하고, 다양한 디자이너들과 교류할 기회를 만드는 것, 이 과정 자체가 마켓을 진행하는 의미였던 것 같아요. 판매에만 집중했다면 쉽게 지쳤겠죠.


2018 All That Glitters × KioskKiosk 크리스마스 마켓 포스터(공동 작업 : 이진우)


2019 All That Glitters ‘Ready-To-Work : Heatwave Warning’

   운영자로서는 약간의 부담이 수반된 행사였지만, 참여자로서는 훨씬 즐기기 쉬웠던 것 같아요. 내가 디자인한 것이 즉각적인 호응을 얻고, 누군가의 취향이 되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모습을 본다는 게 참 단순하지만 디자이너로서 뿌듯한 지점이더라고요. 이진우, 정길웅 디자이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ATG의 시작도 결국 클라이언트잡에 지친 디자이너가 자아를 잃지 않고 계속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봐요.

   올해에는 다섯 번째 마켓을 진행할 예정이에요. 다만 오프라인 마켓을 몇 차례 진행하며 물리적 한계를 느꼈고, 최근엔 공동 스튜디오를 이전하면서 공간에 대한 고민도 생긴 터라 향후 방향성에 대해 다 같이 모색하는 중입니다. 더 흥미로운 방식이 될 만남을 기대해주세요.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 좀 머쓱해집니다만, 그래도 그냥 질문 드리겠습니다. PHENOMENA의 작업들, 그러니까 클라이언트잡과 작가님 개인 작업의 스타일이 무척 달라 보입니다. 특히 저는 〈2019 타이포잔치〉 출품작 ‘오브제-글자 모아쓰기’가 인상적이었거든요. “한글의 표기 방식인 모아쓰기를 3차원 오브제를 통해 재해석한 작업이다”, “공간 속에서 물성과 중력에 의해 다양한 형상으로 변화하는 글자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같은 작품 소개도 기억에 남습니다. 실험적 시도라 느꼈어요. 이런 실험 본능(?)을 억누르고 클라이언트잡에만 집중한다면 상당히 답답하겠다, 라고 저 혼자 생각했습니다. 작가님 본인은 어떠세요? 클라이언트잡과 자기표현 욕구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시는 편인가요?

   클라이언트잡과 개인 작업의 스타일 차이에는 현실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는 듯합니다. 가장 흔한 경우는 클라이언트에게 익숙한 방식이나 취향을 꺾지 못하는 경우죠. “이건 너무 난해하다는데요”, “글자가 잘 안 읽히지 않을까요”, “더 깔끔하게 해주세요” 등등. 실험적이지는 않더라도 제법 대담한 디자인을 설득시키고 싶을 때는 논리를 강화하거나 퀄리티를 더 올리는 방법을 써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저 자신이 논리의 빈약함을 느끼고 포기할 때도 많지요. 그래도 ‘밀당’을 항상 시도해봅니다. 특히 욕심이 많이 나는 콘텐츠의 경우는 일단 한 번은 질러보는 편이에요. 과연 어느 선까지 허용될 것인가? 클라이언트가 같이 모험을 해준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쉽지 않은 경우가 많죠. 그렇게 B안들은 쌓여가고······ 물론 아쉽기는 한데, 제가 찾은 방법론이 충분히 단단한 구조나 논리를 갖췄다면 언젠가 더 잘 맞는 곳에 사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잘 모아둡니다. 훗날을 기약하죠. 실제로 그렇게 모셔둔 B안이 부분적이나마 다른 프로젝트에 활용되곤 합니다.

   무엇보다도 다행인 것은, 처음 필드로 나왔을 때보다 클라이언트잡 과정에서 표현에 대한 욕구 불만에 잘 빠지지 않게 된 점이에요. 오히려 그런 제약 속에서 디자인하는 것이 무한정으로 열려 있는 조건에서 디자인하는 것보다 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클라이언트가 자기 머릿속에서 이미 80퍼센트쯤 완성된 그림을 던져준다 해도, 나머지 20프로를 어떻게 이끌어나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런 게 디자이너의 역량이겠죠.


〈2019 타이포잔치〉 '다면체' 섹션 참여작 '오브제-글자 모아쓰기'

   ‘실험적’이라는 표현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어요.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해주신 말인데, 실험이라는 것은 전제 조건과 가설이 있고 그것을 증명해나가는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디자인에서의 ‘실험적’이라는 말도 같아요. 증명해보고 싶은 주제와 방법론이 있을 때 그것을 펼쳐서 과연 생각처럼 유효한지 알아보는 과정이 실험적인 것이고 ‘오브제-글자 모아쓰기’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예측 불가능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다가 흥미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 이건 실험이기보다 ‘발견’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클라이언트잡을 할 때 오히려 열어두는 것은 그런 ‘발견’의 지점이에요. 제약이 강할수록 뜻밖의 발견이 더욱 반갑고 재밌거든요. 굳이 비교를 하자면, 자기표현이 잘 안 될 때보다 아무런 발견도 이루어지지 않는 작업을 할 때가 더 답답합니다. 지루하기도 하고요. 자기표현은 내재적 느낌이지만 발견은 대상과 상호 작용으로 생기는 이벤트 같거든요.


의류 브랜드 Egokita 포스터


서울문화재단 × 삼일로창고극장 〈퍼포논문〉 프로그램북 (공동 작업: 이진우)


지난해 말부터 『타이포그래피 서울』은 ‘interVIEW / afterView’라는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어요. 3~4년 전, 5~6년 전 인터뷰했던 디자이너들을 다시 만나보는 코너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분들이 있는가 하면, 꽤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분들도 있습니다. 만약 5년 후 ‘interVIEW / afterView’ 코너로 『타이포그래피 서울』과 ‘PHNOMENA 아트디렉터 임이랑’이 다시 만난다면, 어떤 모습이고 싶으세요?

   전 드라마틱한 게 좋아요. 5년이 순탄하지 않게 흘러갔으면 좋겠어요. 너무 고생은 안 했으면 좋겠지만 부딪혀볼 수 있는 일들은 최대한 부딪혀보면서 디자이너로서 단단해졌으면 좋겠어요. 노련해지는 것은 좋지만 관성적으로 일하는 디자이너는 되지 않아야겠죠. 운 좋게도 주변에 같은 길을 걷는 디자이너가 많다 보니 배우는 게 많았어요. 때로는 그것이 스튜디오를 운영해나가는 현실적 팁이기도 하고, 작업자로서 자신만의 문법을 완성해나가는 방법이기도 해요. 저도 5년 후에는 누군가에게 건강한 영향을 주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요.


맨 위로 기사 공유하기 인쇄하기
맨 위로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