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의 저작권 이야기] #4 이효석의 ‘고료’와 오늘날의 ‘인세’2020.04.29




   우리나라의 저작권 의식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개념의 출판이 성행하면서 싹튼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우리 근대화 시기의 종두법(種痘法)으로 유명한 의학자 지석영(池錫永, 1855~1935)이 1882년 8월 올린 상소문의 한 대목이다.

서적을 간행하는 자는 그 공적의 정도를 밝혀주도록 하고, 기기(機器)를 만드는 자에게는 전매(專賣)를 허용케 하며, (다른 사람의 서적을) 번각(飜刻)하는 것을 금하게 한다.*
* 원문 생략.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82년 8월 3일조. 이종국(1996), 『한국의 근대 인쇄출판문화 연구: 신서적과 그 인쇄출판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출판학회 편, 『인쇄출판문화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연구논문집』, 청주: 청주고인쇄박물관, 91쪽에서 재인용.

여기서 지석영은 “번각(한 번 새긴 것을 본보기로 삼아 다시 새김)하는 것을 금하게 한다”라고 하여 저술 활동의 창조성과 출판 및 저작권의 보호를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 3월 발행된 《한성순보》의 외신란 또한 살펴볼 만하다. ‘출판권’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기사가 실려 있는데, 출판권에 관한 초창기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즉, “구미 각국에서 취하고 있는 이른바 출판권이라는 것은 도서를 저술하거나 외국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자를 위해 자국 정부가 엄정한 규칙을 발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타인이 모방한다거나 또는 허락을 얻지 않고 인출(印出) 판매할 수 없으므로, (그 출판권자는) 저술과 번역에 따른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개명(開明)된 세상의 도(道)”라고 소개하고 있다.*
* 〈출판권(出版權)〉,《한성순보》 제15호, 1884년 3월 18일자 18면.


  1900년대 문헌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저작권

   저작권 분쟁이라 할 만한 1900년대 초 사건의 기록도 있다. 1908년 9월 10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된 ‘판권소유’라는 제목의 기사다.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교과서 저술가로 유명한 현채(玄采)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저작한 책 『고등소학이과서(高等小學理科書)』의 내용 상당 부분을 정인호(鄭寅琥)라는 이가 무단 전재하여 별도의 도서로 출판했다. 원저작자(현채)는 무단 복제자(정인호)에게 저작권 사용료를 요구했고, 합의되지 않아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저작권을 한꺼번에 사고파는 관행, 즉 저작재산권 양도 관행이 당시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존재한다. 한 소설책 말미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이 글은 박이양(朴頤陽) 씨의 저작이나 저작판권이 남궁준 소유이기로 발행 겸 소유는 남궁준이라 하오.*
* 1912년 유일서관 발행, 『명월정』, 130쪽.

이러한 양상에 대한 보다 확실한 기록은 작가 김동인의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소설가(저작자)가 원고(原稿)를 쓴 뒤 일정 금액을 받고 출판사에 양도(매매)하면, 출판사의 사주가 자기 명의로 발행하는 관행이 있었음을 설명하는 글이다.

그런 종류의 저작물(소설)의 저자는 그런 것을 저술하여 출판자(대개 서사[書肆])에 돈 십 원 혹은 이십 원에 넘겨주고 출판자는 그런 것을 사서는 자기의 명의로 출판하여 발행하여 왔다. 그리고 그런 저작물이 일단 저작자에게서 출판자에게로 넘어간 뒤에는 그 저작물은 재정적으로건 명예적으로건 도덕적으로건 일체의 권리와 의무가 매주(買主)에게 넘어가고 원저자는 아무 책임이 없어진다. (···) 이것을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현행 법률로 말하자면 저작자가 출판업자에게 대하여 저작권과 출판권을 아울러 양도한 것이 된다.*
* 김동인(1948). 조선의 소위 판권 문제. 『신천지』 1948년 1월호(통권 제22호).

오늘날이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지금은 저작인격권과 저작재산권이 엄격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 글의 내용이 사실이었다면, 당시엔 원고가 출판사에 양도되어 출판하게 되면 양수자의 이름으로 저작자가 표기되었고, 원저자는 저작권에 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했다는 말이 된다. 김동인이 이 같은 사실을 언급할 당시인 1948년 1월은 미군정 시기였지만 모든 법률은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저작권법도 예외는 아니었다.


  출판 산업 발전과 함께 정착된 저작권법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제헌헌법)은 제1호 제14조를 통해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저작자, 발명가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라고 규정했다. 한국 저작권 법제가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 시발점이다.

이 같은 헌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본 법은 학문적 또는 예술적 저작물의 저작자를 보호하여 민족문화의 향상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기치 아래 비로소 저작권법이 제정된 것은 1957년 1월 28일(법률 제432호)의 일이었다. 반면에 일본은 1899년 저작권법을 제정함으로써 1999년 저작권법 제정 100주년을 맞이했다.

1908년 8월 16일 대한제국이 저작권령(내각고시 제4호/칙령 제200호)을 공포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일본 저작권법을 의용(依用, 다른 나라의 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1910년 “저작권법을 조선에서 시행하는 데 관한 건”(칙령 338호)을 통해 의용에서 적용(適用)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만의 독자적인 저작권법으로 보기 어렵다. 곧 조선총독부, 미국에 의한 군정, 대한민국 정부 수립 등에 이르기까지, 즉 1945년 광복과 정부수립 후에도 1957년 저작권법이 시행되기 전까지 우리 땅에서는 일본 저작권법이 적용되었다. 결국 1908년 8월 16일부터 1957년 1월 28일까지는, 대한민국에서 공표된 저작물이라 해도 일본 저작권법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의 일본 저작권법은 실질적 효력을 갖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1910년대 우리나라 저작권법은 일본의 저작권법을 ‘의용’하다가 ‘적용’하였지만 선언적 의미만 가졌을 뿐 우리에게는 ‘무용’한 법률이었다.”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강점으로 일본의 저작권법이 우리나라에 적용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저작권법이 저작권의 등록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해당 관청에 등록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면서도 등록에 관한 규정은 별도 명령으로 정한다는 내용의 선언적 문장만이 있을 뿐이다. 법률상 저작권 보호의 대항 조건으로 등록할 방법이 없었고, 구제 방법으로 총독부에서 등록할 수 있는 절차가 있긴 하였지만 일본어 이외 한국어의 등록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때 한국어 출판물의 저작권은 법적 보호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일본의 저작권법은 한국어 저작권 보호에 있어서 명분상 선언적 의미를 띨 뿐이었다.

우리의 현행 저작권법(법률 제12137호)은 출판을 가리켜 “저작물을 인쇄, 그 밖에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문서 또는 도화(圖畵)로 발행”(제63조 제1항)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이는 1957년 처음 제정된 저작권법(법률 제432호)에서 출판을 “문서, 회화 등의 저작물을 인쇄술 기타의 기계적, 화학적 방법에 의하여 복제하여 발매 또는 배포함을 말한다.”라고 정의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곧 출판 문화의 발흥과 출판 산업의 발전이야말로 한국 저작권 제도의 정착에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인세’ 아니고 ‘저작권사용료’

   한국 근대문학을 이끌었던 소설가 이효석의 수필 「고료(稿料)」는 연재 소설 고료에 관한 글이다. 고료 지급의 개념, 혹은 금액 산정이 언제부터 체계화됐는지를 그는 적고 있다. 신문의 경우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잡지 쪽은 1923~1924년경 확립됐다고 한다. 아울러 당시 고료는 200자 원고지 한 매당 15전이었다고. 이효석의 시대에 ‘고료’라 불리던 것이 지금은 종종 ‘인세(印稅)’라 호칭된다. 왜 ‘저작권사용료’라고 해야 할 것을 ‘인세’라 부르는 걸까? 

한때 한국과 일본에서는 도서의 간기면(刊記面)*에 저자 검인(檢印)을 붙여 출판 승낙 및 발행 부수를 확인했다. 그렇게 붙인 증지(證紙)의 수로 저작권사용료를 계산했는데, 다시 말해 도장[印]을 찍은 수대로 돈[稅]을 지불했던 것이다. ‘인세’라는 말이 쓰이게 된 배경이다.
* 책의 저작권 및 출판권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발행일, 쇄(刷)와 판(版) 등의 정보를 모아놓은 쪽(페이지)을 가리킨다. 이처럼 간기면은 정식 출판물이라면 결코 생략해서는 안 되는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출판계에서는 별도 면을 할애하지 못할지라도 그 내용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지 표기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대체로 간기면에는 저작자 및 저작재산권자, 발행인, 발행처, 인쇄일, 발행일, 해당 책의 판과 쇄, 발행처의 주소, 연락처, 등록번호, ISBN, 도서 정가 등을 수록한다. 그 외에 출판사에 따라 편집자 등 책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외주업체 정보를 넣기도 하고, 해당 책의 초판부터 현재 판과 쇄의 발행일을 모두 적기도 한다. 또한 저작권자의 검인지를 첩부하거나 협의에 따라 생략하기도 한다.

이러한 검인첩부(檢印貼付) 방식은 1901년 독일 출판권법이 출판권설정제도와 함께 검인제도를 인정한 데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져 있다. 독일의 검인제도는 일본 저작권법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우리나라가 이를 모방하면서 자연히 검인첩부 또한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은 물론 일본의 저작권법에서조차도 검인첩부제도에 관한 규정은 삭제되었다. 우리나라 저작권법만 아직도 이를 저작권자와 출판권자가 협의하여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인세’라는 말 대신 ‘저작권사용료’, 영어로는 ‘로열티(royalty)라는 말을 써야 하겠다.


「김기태의 저작권 이야기」 시리즈



저작권 연구자,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미디어와 저작권의 상관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출판 편집자로 일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문헌번호운영위원장, 한국전자출판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연구윤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각종 기관과 단체에서 저작권 및 연구 윤리에 관한 자문, 강의를 맡고 있다. 2018년 '생활 속의 표절과 저작권'이 K-MOOC 강좌에 선정되었다. 저서로 『출판실무와 저작권』, 『김기태의 저작권 수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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