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체’ 만드는 BX디자이너 고경아2021.02.08



디자이너 고경아는 올해 5월 정식 발표 예정인 자신의 서체 ‘길상체’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패션 브랜드 기업의 BX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지만, 이 현직은 ‘길상체 디자이너’라는 수식어에 뒤세워지곤 한다.  ‘대형 폰트 회사가 아닌 독립 디자이너가 제작한 37개 서체(Indipendent Typeface 37)’를 소개한 월간 『디자인』 2021년 2월호(통권 512호)에도 고경아의 길상체가 실렸다. 엄밀히 따지면 고경아는 일반적 의미의 독립 디자이너가 아니다. BX디자이너로서 회사에 근무하고 있으니까. 다만, 서체 디자인에 한해서라면 독립 디자이너로 불려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는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을 이용해 서체를 그린다. 그러니까, 퇴근 후 시간과 주말 동안 고경아는 ‘길상체로써 독립된 상태’인 셈이다.

고경아를 인터뷰해보고 싶다, 라고 에디터가 마음먹은 계기는 물론 길상체였다. 그런데 서체 자체보다는, 제작비 마련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페이지 내용이 더 흥미로웠다. 크라우드 펀딩 페이지는 일종의 ‘투자자 유치용 제안서’다. 고경아가 작성한 길상체 크라우드 펀딩 페이지는 그 본질을 성실히 충족하고 있었다. 기획 의도, 콘셉트 도출, 네이밍, 과업 내용, 워크플로우, 타임테이블 등 제안서의 기본적인 구조와 문법을 정확히 지키고 있었다. 서체 개발 제안서의 참고 양식으로 삼아도 좋겠다, 이 제안자는 서체를 글자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서체 디자인을 ‘브랜딩’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독립 서체 디자이너라기보다는 ‘퇴근 후 시간과 주말 동안 자기 자신이라는 회사에 제2의 출근을 하는’ 디자이너다, 라고 에디터는 느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덜컥 인터뷰 요청을 하고 말았으니, 행여나 고경아가 고경아 안에서 격무를 겪진 않았을지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인터뷰 _ 에디터 임재훈
director@typographyseoul.com


지난해 크라우드펀딩 프로젝트 「단단하고 진중한 활자 ‘길상’」을 통해 ‘디자이너 고경아’라는 이름을 알게 됐습니다. 가로쓰기용 디스플레이 활자 길상체를 개발 중인 BX 디자이너, 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제가 주목했던 건 프로젝트 자체보다는 프로젝트 소개 내용이었습니다. 초기 아이데이션부터 구체적인 기획 과정, 현재 작업 진척도, 향후 일정 등 구성이 퍽 체계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서체의 ‘외면의 인상’과 ‘내면의 인상’을 구분한 점이 저는 좋더라고요. ‘작업 대상을 다면적·분석적으로 접근하는 디자이너일지 모르겠다’라는 게 제 첫인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브랜드 디자인을 하시는 분이니 서체도 일종의 ‘브랜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고요. 회사에서 각종 기획서나 제안서도 잘 쓰실 것 같다는 추측도요.(웃음)

크라우드펀딩 소개문만 읽어도 길상체가 어떤 서체인지 머릿속에 잘 그려져서, 굳이 서체 자체에 대한 질문을 드릴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이런 게 궁금하네요. 길상체의 외면의 인상 키워드들, 내면의 인상 키워드들의 교집합이 ‘진중함’과 ‘단단함’이라고 설명을 해놓으셨던데요. 그러면 디자이너 고경아 자신의 외면의 인상, 내면의 인상, 그리고 그 둘의 교집합은 어떤 키워드로 설명하고 싶으세요?

길상체의 ‘단단하고 진중한’ 인상은 제가 지향하는 모습이기도 해요. 길상체 인상에 관한 키워드는 이용제 디자이너가 쓴 논문 ⌜한글 글자체의 인상(印象)⌟의 122개 어휘를 참고한 건데, 이번에도 같은 출처에서 인용을 해볼게요. 제가,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성격인 데다 목소리도 크고 날카로운 편입니다. 그래서 냉담하고 냉정한 인상으로 보는 분들이 많아요. 점잖은 선비 분위기가 있다는 말도 자주 듣고요. 사실 내면은 꽤나 감성적이고 발랄한데, 이 모습을 아무에게나 드러내진 않는 것 같아요.

외면의 인상(냉담함·냉정함·점잖음)과 내면의 인상(감성적·발랄함)의 교집합은··· 조금 멋쩍지만, 아마도 ‘꼼꼼함’과 ‘당참’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일할 때 발휘되는 모습이에요. 프로젝트 자료와 폴더 정리를 병적으로 하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주도적으로 하는 제 자신을 자주 발견하거든요. 에디터님이 예상하신 것처럼 기획서와 제안서를 쓰고 정리하는 걸 즐깁니다.


고경아 스스로 정의하는 자신의 외면과 내면 인상 키워드



길상체, 2021


길상체 얘기를 좀더 해보겠습니다. 크라우드펀딩 프로젝트 일정에 따르면 올해 5월 31일이 ‘최종 버전’ 납품(길상체 통합형 후원자들에게 발송)이잖아요. 인터뷰 시점 기준으로 마감일까지 4개월쯤 남은 셈입니다. 현재 진행 상황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2020년 12월에 KS 기준 한글 2,350자가 그려진 베타 버전을 후원자 분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후 추가자 430자 중 180자를 더 그려서, 지금은 한글 250자가 남은 상태고요. 라틴 알파벳과 숫자, 그리고 문장부호 및 특수기호 약 1,000자를 더하면 최종 버전 완성입니다. 우선은 2월 안에 남은 글자를 모두 그리는 게 목표예요. 3, 4, 5월은 그린 글자들을 살피며 계속 수정할 계획입니다. 베타 버전이라는 큰 고개를 넘겼지만, 가파른 마지막 고개가 남아 있는 기분이에요. 최종 버전을 납품하면 그동안 작업했던 자료들을 모아 글꼴 보기집을 만들어 후원자 분들과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싶어요. 물론, 아직까지는 바람일 뿐입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일단 지금은 최종 버전 납품을 위해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다.


서체 디자인이 ‘부캐’의 영역이라면, 디자이너 고경아의 ‘메캐’는 역시 BX 디자이너입니다.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패션 기업 인하우스 팀에 근무하시는 걸로 아는데요. 패션 브랜드의 BX 디자이너는 주로 어떤 작업(업무)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현재 제가 재직 중인 회사는 온라인 패션 편집숍 운영과 패션·뷰티 브랜드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오프라인 매장 없이 모든 사업이 온라인에서 전개됩니다. 그래서 사내 디자이너 대부분이 온라인 매체를 다루는 UX/UI 디자이너예요. 저는 자사 편집숍과 패션 브랜드에 필요한 로고부터 의류 부자재, 패키지 디자인까지 실제 물성이 있는 결과물 제작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자사 편집숍의 택배 상자와 고객 안내문 등을 디자인하고, 자사 브랜드의 의류태그, 라벨, 패키지 그리고 습자지에 붙이는 스티커 하나까지 제 손을 거쳐요. 회사가 ‘패션’이라는 가치를 고객에게 전달할 때, 고객의 손에 닿는 마지막 순간까지의 경험을 디자인으로 실현하는 일이 제 몫이라고 생각해요. 제품을 구매해서 받아보기 전에는 드러나지 않고 고객이 인지할 수 없는 부분인데요. 다음 구매로 이어지는 데에는 이전 구매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온라인 기반 사업에서는 간과할 수 없죠.


패션 브랜드 FRONTROW 작업물, 2020

카페 담수7.0’ SNS 이미지 작업, 2020


고객의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는 분이니까, 서체를 브랜딩의 요소로 바라보고 다루는 데도 익숙하실 것 같아요. BX 디자이너로서 갖고 있는 서체 혹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목소리와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마다 다른 목소리를 갖고 있고, 때로는 목소리 자체가 매력이 되기도 하잖아요. 제 경우는 브랜드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가장 적합한 어조와 높낮이, 말하는 속도와 목소리의 크기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서체와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합니다. 디자인 전문 회사에서 일할 때 단순히 ‘서체는 디자인 요소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서체를 직접 그려보니까 생각보다 그 안에 담을 수 있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국내 브랜딩 프로젝트를 살펴보면 라틴 알파벳 로고타입부터 타이포그래피까지는 정말 개성 있고 좋은데, 한글은 몇 가지 고딕 서체로 통일된 게 많아요. 한글 서체 구매와 개발에 드는 시간과 비용 절감이 현실적 이유겠죠. 그래도 ‘주로 라틴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한글은 최소한으로 사용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브랜드에 적합한 한글 서체 활용과 개발이 활발히 이뤄지는 시각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습니다.


브런치에 쓰신 「자극이 아닌 진정한 영감이 되려면」이라는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수집’에 대한 필자만의 방법론과 철학이 확고해 보였습니다. 디자이너 고경아만의 수집‘론’에 대해 좀더 들어볼 수 있을까요?

글에도 적었듯이 영감이 될 수 있는 소재를 ‘틈틈이’ 수집하는 것과 선별·분류 과정을 거쳐 차곡차곡 ‘보관’한 다음, 주기적으로 꺼내서 ‘체득’하려고 합니다. 신입 디자이너일 때 아는 게 없으니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느껴서 만든 일종의 생존법이에요. 불안감은 늘 잠재돼 있다가 불현듯 찾아오거든요. 그래서 제 자신에게 ‘그래도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응원해주기 위한 방법이기도 해요. 날을 잡아서 하기보다는 괜찮은 소재가 보일 때마다 ‘틈틈이’ 하는 게 포인트입니다. 저는 인쇄물 작업을 주로 하는데, 일할 때 제가 소장한 레퍼런스를 기획자에게 보여주기도 해요. 그러면 훨씬 소통이 수월해지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내가 수집한 레퍼런스와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낼까 봐 걱정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레퍼런스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살펴봐야만 내 디자인의 정체성이 뾰족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혼자서 하는 수집과 체득의 단계는 이제 익숙해져서, 이제는 다른 디자이너들과 각자의 수집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고 싶기도 해요. 요즘에 ‘클럽하우스’라는 관심사 기반의 소셜미디어 플랫폼이 인기라고 하던데요. 저도 방이라도 하나 만들어볼까 봐요.


브런치 연재글을 위한 일러스트레이션 작업, 2020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인터뷰 코너 중 「인터뷰 / 애프터뷰」라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 인터뷰이를 수 년이 지난 뒤 다시 만나 그간의 변화와 근황을 들어보는 시리즈입니다. 지금부터 한 5년 후에 디자이너 고경아와의 「인터뷰 / 애프터뷰」를 진행해볼 계획입니다.(웃음) 5년이 지난 뒤의 디자이너 고경아, 어떤 모습이 되어 있기를 바라시나요.

지금 진행 중인 길상체 제작을 잘 마무리하는 것과 회사에서 곧 론칭할 프로젝트를 잘 이끄는 것 말고는 당장 바라는 게 없어요. 먼 미래를 계획하는 것보다 그때그때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이라서요. 5년 후에도 그때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앞에서 얘기한 디자인 전문 회사와 길상체 제작, 그리고 패션 기업 BX디자이너로서의 경험은 모두 휴학생 신분으로 지난 4년간 벌어진 일이에요. 학부 졸업이 항상 마음의 숙제로 남아 있는 터라(웃음), 향후 5년 안에는 꼭 복학해서 졸업했으면 합니다.


길상체로 쓴 문장


타이포그래피서울 바로가기타이포그래피서울 네이버포스트타이포그래피서울 페이스북타이포그래피서울 인스타그램

YOONDESIGN GROUP

homeblogfacebookinstagramstore


맨 위로 기사 공유하기 인쇄하기
맨 위로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