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석훈의 한글 디자인 품과 격 #3 ‘노브랜드’ 전용서체와 타이포브랜딩2021.02.19




이 글은 『한글 디자인 품과 격(편석훈 저, 윤디자인그룹, 2020) 내용 일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더 많은 내용은 책 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ㄱ            


2016년 시작한 노브랜드(No Brand) 전용서체 프로젝트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브랜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브랜드에게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주어야 할까, 라는 화두 때문이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노브랜드는 이마트의 PB(Private Brand, 자체 브랜드)다. 최적의 소재와 제조 방법을 찾아 가장 최적의 가격대를 만드는 것이 노브랜드의 전략이다.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자다.’라는 슬로건이 브랜드 이름과 취지를 부연해준다. 브랜드 이름값보다 소비자들의 합리적 구매 경험을 더 중히 여기겠다는 메시지다. 이러한 브랜드 콘셉트에 따라 노브랜드 상품들의 패키지 디자인은 무척 간결하다. 제품명, 제품 사진, 제품 정보, 노브랜드 마크 정도로만 구성돼 있다. 그 흔한 카피 한 줄 안 들어간다. 패키징 자체가 브랜드 철학(품질 외 군더더기는 최대한 걷어낸다)과 이어지는 셈이다. 패션으로 따지면 심플 룩 내지는 베이직 룩이라고 할까.



노브랜드 로고 및 전용서체의 5개국어 용례


‘진지한 궁서체’에 숨은 브랜딩 비밀

2016년 당시 노브랜드는 전용서체 없이 여러 종류의 기성 서체들을 혼용했다. 제품마다 마케팅마다 각기 다른 서체가 쓰였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불필요한 라이선스 비용(서체의 상업적 이용에 따른 부담 비용)이 발생하고, 브랜드 자체의 전체적인 통일성이 저하되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많은 분들이 고개를 갸웃할 듯하다. ‘라이선스 비용 문제는 알겠는데, 서체 혼용이 어째서 브랜드 통일성 저하로 이어질까’라는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잠깐 설명을 덧붙여본다.

요즘 언어 생활에서 관용구처럼 쓰이는 표현 중 ‘나 지금 진지한 궁서체다’라는 게 있다. 서체 디자인 종사자들에겐 결코 가볍게 들릴 수 없는 말이다. 대중이 궁서체를 ‘진지한 서체’로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인데, 달리 말해 대중이 ‘글자의 표정’을 감지한다는 뜻이다. 표정은 소통의 중요한 요소다. 이쪽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데 저쪽에서 미소를 띤다면 쌍방 소통은 막힌다. 소통의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표정을 살펴야 한다. 표정 관리가 필요한 이유다.

브랜드/브랜딩에서의 전용서체는 표정 관리를 위한 요소다. 제품의 패키징 및 마케팅 활동에는 수많은 글자들이 활용된다. 기업들은 다양한 텍스트 언어로써 소비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들은 기업이 발신하는 글자 한 자 한 자로부터 ‘표정’을 읽어낸다. 표정이 어색하다 싶으면, 메시지 내용과 무관하게 소비자들은 감응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업들은 브랜드 서체를 원한다.




‘노브랜드’에게는 어떤 표정을 부여해야 할까

노브랜드 전용서체는 기본적으로 고딕체다. 세리프 없는 직선 획으로 또렷하고 명료한 인상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고딕체라고 해서 직선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ㄹ·ㅅ’에는 손글씨 느낌의 곡선 획이 들어가 있는데, 서체의 전체적 표정이 너무 딱딱해지지 않도록 고려한 시각 요소다. 또한, 한글 ‘’과 소문자 라틴 알파벳 ‘’의 형태를 동일하게 했는데, 이로 인해 두 문자 간 시각 통일성이 성립된다.

노브랜드 서체는 브랜드 표현뿐 아니라 패키지에서의 제품 정보 및 가격 표시 용도로도 사용돼야 하기에, 숫자와 기호 디자인 역시 중요했다. 그래서 화폐·단위 기호 크기와 폭 조정, 한글 ‘ㅇ’이나 알파벳 ‘o’와 변별되는 숫자 ‘0’, ‘3·6·8·9’의 속공간 형태 통일 등으로 식별 저하 현상을 최소화했다. 작게 써도 잘 보이도록 기술적 논리 연산 장치(logic unit)를 탑재해둔 셈이다.







개발 뒷이야기 한 토막을 풀어보자면, 본래 노브랜드 전용서체는 라틴 알파벳 따로 한글 따로 진행되고 있었다. 라틴 알파벳은 해외 업체에 외주를 맡기고 한글은 윤디자인그룹이 담당했다. 그런데 외주사에서 넘어온 시안들과 한글 시안들을 나란히 놓고 보니 이질감이 느껴졌다. ‘look and feel’이 어긋났던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니즈(정돈되고 안정감 있는 디자인)와도 맞지 않았다. 이미 외주비를 지급한 상태였지만, 나는 우리 직원들에게 라틴 알파벳 서체 디자인을 진행시켰다.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얼마간의 손해를 감수한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고, 교훈도 얻었다. 브랜드 전용서체로서 한글과 라틴 알파벳은 반드시 한 맥락 안에서 동시에 다뤄져야 ‘look and feel’이 제대로 나온다는 것. 이렇게 작업될 때 비로소 타이포브랜딩의 완성도가 보장된다는 것을 말이다.

현재 노브랜드 전용서체는 제품 패키지부터 브랜드 슬로건, 마케팅 메시지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범위에 걸쳐 활용되고 있다. 물건 하나 살 때도 꼼꼼히 비교해보는 당신, 왠지 따뜻하고 이성적인 데다가 또렷하고 명료하기까지 한 사람일 것 같다. 어떤 매장에서든 노브랜드는 당신과 가장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는 이에게 끌린다고 들었는데, 여러분도 동의하시는지.




시리즈  편석훈의 한글 디자인 품과 격
#1 ‘30년 스테디셀러’ 윤명조·윤고딕 ➲ http://www.typographyseoul.com/news/detail/1280
#2 ‘고딕스러운 굴림, 굴림스러운 고딕’ 윤굴림 ➲ http://www.typographyseoul.com/news/detail/1286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한글 디자인 품과 격』
지은이  편석훈
출판사  ㈜윤디자인그룹
출간일  2020년 10월 9일 한글날
크기 및 분량  175 × 225 × 24.5㎜, 264쪽
ISBN  9791195218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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