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엉뚱상상: 레터빌런의 침공 #1 그래서, 우리는 ‘빌런’이 되기로 했다2021.11.04




폰트를 완전히 다르게 즐기기 위해
읽고 쓰는 도구 너머의 폰트 신세계를 위해
디지털 환경이 아닌 디지털 ‘시대’의 폰트를 위해
레터빌런―Letter Villain이 되기로 작정한
엉뚱상상의 이야기

―  엉 뚱 상 상  :  레 터 빌 런 의  침 공  ―
 1화 | 그래서, 우리는 ‘빌런’이 되기로 했다 
엉뚱상상 최치영

ㅇ               

아주 사적인, 그리고 조금 긴 이야기

편집 디자이너가 서체 회사로 넘어온 까닭


어느 디자인 분야든 클라이언트에게 샘플을 눈으로 보여주고 설득한 뒤에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지금 시대는 끝없는 정보의 바다인 만큼, 정말 좋은 글로벌 샘플을 취합하고 재조합하여 나름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클라이언트에게 보여주고 설득하여 본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지금이야 Pinterest나 Behance에서 손쉽게 글로벌 샘플을 긁어와 제안 자료로 활용할 수 있지만, 필자가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는 해외 디자인 서적을 구매해서 자료를 찾고 스캔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구매한 서적에 적당한 샘플이 없다면 다른 서적을 구매해야 했다.)

본 작업을 시작했다면 그다음부터 진짜 어려움이 펼쳐진다. 왜냐면··· 샘플로 제시한(클라이언트를 유혹하기 위해 수집 및 재구성한) 일러스트레이션, 사진, 타이포그래피가 전부 서양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막상 본 작업을 하려고 하면 ‘왜 한글로 하면 이런 느낌이 안 나지?’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디자인 프로젝트를 많이 진행해본 클라이언트는 ‘한글로 작업한 샘플’을 보여달라고 요청한다. 클라이언트사가 한국 기업인 이상 당연히 ‘한글을 적극 사용한 결과물’이 필요하다는 걸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어떤 클라이언트에게 인물 일러스트레이션과 사진을 샘플로 제시했던 적이 있다. 물론 서양의 것이었다. 여러 인종의 다양한 헤어 컬러로 인해 시각적으로 다채로워 보였고, 이게 왠지 모르게 좋아 보였다. 그런데··· 이걸 한국 기업의 콘텐츠에 맞춰 진행하려니 뭔가 어색했다. 샘플에선 다채로웠던 시각성이 실제 작업에선 단조롭고 획일화된 모습으로 보였다.

또한, 샘플로 제안했던 사진이 좋아 보였던 이유 중 가장 큰 요소는 사진 속 소품들이 로마자 상표들로 디자인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통되는 상품들로 대체해서 촬영을 하면 샘플만큼의 ‘버터 감성’이 전달되지 않는다.(본 작업을 위해 사진가에게 서양 소품들이 가득한 샘플을 보여주면, “이건 ‘서양의 신비’라서 한글로 된 소품에선 이런 느낌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먼저 말한다.) 비유를 하자면 사진 샘플 속 제품은 ‘하겐다즈(Haagen-Dazs)’인데 실제로 다뤄야 하는 소품은 토종 ‘수박바’인 셈이다. 이런 현상은 웹/편집 디자인에서도 나타난다. 타이틀은 로마자로 큼직하게, 본문은 한글 폰트로 자세를 잡아주는 예가 적잖다. 간혹 로마자로 세팅된 타이틀에 내가 모르는 단어라도 있으면 ‘저건 누굴 위한 것인가?’라는 생각까지 든다.

내가 편집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작업물의 ‘자세’를 높이기 위해 이유 없이 ‘로마자'를 적극 사용하게 되는 상황 말이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발음 기호조차 모르는 로마자를 큼직하게 바르고 있는 모습···. 헬베티카(Helvetica), 유니버스(Univers)처럼 시원시원하게 바를(?) 수 있는 한글 폰트가 간절했다. 그래서 나는 서체 회사(즉, 윤디자인그룹)로 넘어오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똑같은 서체의 사용 후기를 요청했다

편집 디자이너와 방송 디자이너의 평이 엇갈렸다


알다시피 디지털 시대가 안착하면서 서체를 사용하는 매체들은 크게 변화했다. 서체를 사용하는 디자이너들의 서체를 바라보는 시점도 다양해지면서 의견 차도 생겼다. 그런데 편집 디자이너로서 서체 회사에서 일을 해보니, 인쇄/편집 디자이너가 폰트를 사용하는 기준으로 글자가 디자인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인쇄/편집 시대 때 폰트는 로마자와 숫자가 한글보다 살짝 ‘알이 작게’ 디자인되었다. 인쇄/편집 디자이너는 많은 양의 텍스트를 다루고, 글줄을 고르게 만들어 텍스트가 균일하게 읽히도록 조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자와 숫자 크기가 한글과 같도록 디자인한 서체로 글줄을 만들어 보여줄 경우, 디자이너가 아닌 사람들도 “로마자와 숫자가 커 보인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따라서 인쇄/편집 디자이너들에게는 로마자와 숫자가 한글보다 살짝 작은 서체가 좋은 서체다.

방송 미디어 디자이너들의 사정은 다르다. 그들의 타이포그래피에서는 텍스트 사용량이 적다. 한 문장 또는 제목/부제 정도로 짤막하게 텍스트가 활용된다. 방송 미디어 디자이너들에게 로마자와 숫자가 한글보다 작게 디자인된―즉, 인쇄/편집에 최적화된―서체의 사용 후기를 요청하면 “서체가 잘못 디자인됐다”라는 의견을 받게 된다.

짧은 문장이 균일해 보이려면 한글·로마자·숫자 크기가 모두 같아야 한다. 그런데 인쇄/편집 시대에 최적화된 서체를 사용할 경우 로마자와 숫자가 한글보다 왜소해 보인다. 이런 이유로 방송 미디어 디자이너들은 한 폰트에서 한글·로마자· 숫자를 섞어 사용해야 할 때 임의적으로 로마자와 숫자 크기를 키운다. 방송 미디어 현장의 이 같은 의견을 그동안 몇 차례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서체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반응했었다. 디지털 미디어에서의 서체 활용에 관한 학계의 연구가 이제 막 본격화되었고, 그렇다 보니 나 역시 적절한 응답과 설명을 못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자. 지금 디지털 서체, 즉 ‘폰트’가 쓰이는 매체들은 어떠한가. 인쇄/편집 매체보다 디지털 디바이스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 서체를 바라보는 시각도 디지털 시대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위한 서체 말고

디지털 ‘시대’를 위한 서체!


그냥 ‘디지털 디스플레이에 맞는 서체를 디자인하자!’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엉뚱상상은 한 발 더 나가보고 싶었다. 매체가 인쇄에서 디지털 디스플레이로 바뀐 지 오래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에 맞는 서체가 이미 많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서체들은 ‘인쇄 매체 시대에 만들어졌던 폰트를 디지털 디스플레이에 최적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디지털 시대’에 맞게 만들어진 폰트는 아니다.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디지털 시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본다. ‘디지털 디스플레이’는 미디어가 물성이 바뀐 것이지만, ‘디지털 시대’는 단순히 물성만의 변화뿐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양식 변화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한마디로, 세대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엉뚱상상은 다음 세대의 디스플레이를 위한 서체가 아닌, ‘다음 세대가 경험할 수 있는 서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지금의 〈엉뚱상상: 레터빌런의 침공〉이라는 시리즈를 시작하게 된 거다.

             “ 당 신 은  이 제  폰 트 를  완 전 히  다 르 게  즐 길  겁 니 다 ”                 

엉뚱상상의 모토다. 그동안 폰트는 어떤 매체에 쓰이기 위한 ‘디지털 도구’로 인식되어왔다. 이제는 폰트를 단지 도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로서 다루며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폰트를 사용하는 새로운 매체가, 그것도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매체가 등장할 것이라고 본다. 시대 자체도 이미 바뀌었지만, 시대가 변화하는 양상 또한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앞으로 뭐가 나올지 예측하려면 예측 불가의 영역을 상상하고 주시해야 한다.



202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출품작 [엉뚱상상: 레터빌런의 침공]
엉뚱상상이 제작한 ‘엉뚱상상체'를 ‘서체 × 빛 × 소리 × 인터랙션’이라는 콘셉트로 표현했다.
미디어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으로 완성한, 폰트를 완전히 다르게 즐기게 한 실험물이다.





2021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출품작 [뚱이와 뿡이]
서체와 의자를 결합한 작업으로, 이 역시 폰트를 완전히 다르게 즐기게 한 실험의 산물이다.
덴마크의 가구 디자인 기업 프리츠 한센(Fritz Hansen)으로부터 의자를 협찬 받았다.



〈엉뚱상상: 레터빌런의 침공〉 비긴즈

우리가 ‘빌런’이 되기로 한 이유


윤디자인그룹은 지난 30여 년 동안 대한민국의 서체 문화, 한글 문화를 이끌어온 기업이다. 30여 년 된 기업이 해야 하는 한 가지 의무가 있다. 과거의 명성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 외에,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시대에 대하여 계속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다.

〈엉뚱상상: 레터빌런의 침공〉이라는 시리즈는, 그저 형태가 특이한 한글 폰트를 만들기 위한 시작이 아니다. 1세대·2세대 폰트를 뛰어넘어, 다음 세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폰트를 제안하기 위한 시작이다.

그래서, 〈엉뚱상상: 레터빌런의 침공〉은 서체 회사에서 ‘금기’하는 짓(!)만을 하기로 한다. 이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바로 @엉뚱상상 @레터빌런(글자악당 혹은 글자악동) @침공, 세 가지다. 지금 세대의 서체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한 서체를 제안하는 녀석들이 바로 우리다. 다음 세대를 위한 세대가 무엇일지 고민하고, 다양한 미디어에 새로운 영감을 ‘폰트’로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탄생 목적이다. 앞으로 『타이포그래피 서울』 연재를 통해,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르는 폰트의 문화를 같이 예상하면서 영감을 교감하고 싶다.




about 〈엉뚱상상: 레터빌런의 침공〉  ·  ·  ·  폰트를 완전히 다르게 즐기게 하기 위한 시리즈다. 현재 감독은 최치영이며, 이상민·김정진·김민주·이병헌 등 서체 디자이너 4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폰트를 완전히 다르게 즐기게 하기 위해서는 팀을 운영하는 방법부터 새롭게 바꿔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블 유니버스의 영화들처럼 한 편 한 편 감독은 바뀌지만 세계관은 연결되듯 〈엉뚱상상: 레터빌런의 침공〉도 시리즈를 이어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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