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석훈의 백 투 더 90, 제1회 ‘소망’ 2021.12.16

90 년대 발표된 한글 폰트들을 통해
누군가에겐 당시의 초심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를!


마케팅 분야에서 흔히 말하는 블루오션(blue ocean)은 참으로 매력적인 시장임에 틀림없다. 폰트 시장도 예외가 아닌데, 이제 막 폰트 회사들이 태동하기 시작했던 90년대는 분명 블루오션이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90년대 초 윤디자인연구소(현 윤디자인그룹의 전신)가 윤체를 비롯한 DTP(Desk Top Publishing)에 걸맞은 폰트를 개발한 이후로 여러 업체들이 하나둘씩 이 시장에 뛰어들었고, 이후 비슷비슷한(아류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폰트들이 수없이 등장했으니, 어느덧 이 시장도 레드오션으로 점차 바뀌어 나갔다. 이렇듯 변화하는 시장에서도 지금까지 스테디셀러로 손꼽히는 폰트들은 마케팅 전략을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90년대 폰트를 논하면서 불쑥, 디자인이 아닌 마케팅 분야부터 거론한 것은 ‘기획’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싶어서다.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윤디자인그룹의 디자이너들에게 “기획이 없는 디자인은 기본이 안 된 디자인이며, 기획력이 없는 디자이너는 더이상 생존하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이는 콘셉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기획이 단단한 콘셉트는 차별화된 이미지뿐만 아니라 이를 토대로 다양한 스토리도 만들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명조와 고딕의 융합, 차별화 전략

다시 이번 연재의 주요 언급 대상인 90년대로 돌아가서, 누군가 내게 마케팅 전략을 토대로 90년대 초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윤디자인연구소 대표 베스트셀러 폰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소망’이라고 꼽을 것이다. 그 이유를 하나씩 짚어보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는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디자인 차별화 전략’이다. “명조체의 부드러운 느낌과 고딕체의 직선적인 느낌을 혼합해보자”는 것이 소망체의 디자인 콘셉트였다. 1993년 소망체가 발표된 당시만 해도, 명조와 고딕의 중간 형태의 폰트는 발표되지 않았다. 새롭고 차별화된 디자인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하지만, 이것은 역으로 디자이너들에게는 수많은 고민을 안겨 주기도 한다.

명조와 고딕의 혼합이라는 새로운 발상은 가장 먼저, 기존 한글 폰트 중에 본보기로 삼을 만한 샘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폰트 개발 목적이 설정되면 그 다음은 대개 시장조사부터 하기 마련인데, 제대로 된 시장조사조차 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담당자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했을 것이다. 

또한, 작업 과정에 있어서도 “명조와 고딕 이 두가지 대립되는 요소를 어떻게 혼합하고 절충하는 것이 적정선이 될 것인가?” “세리프(serif)를 어디까지 넣고 어떤 형태로 구성할 것인가?” 등등 콘셉트 추출에서부터 디테일한 표현까지 무척이나 애를 먹었을 것이고, 수차례 시행착오와 수많은 테스트 작업을 거쳤을 것임은 자명하다.

<윤서체 아카이브>에 소개된 ‘소망’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직선의 구조에 슬래브 세리프(slab serif)를 주어 만든 글씨체이다. 글자의 구조에 있어 슬래브 세리프에 브라켓(bracket)을 더하여 부드러운 성격을 지니며, 수직과 수평의 형태는 정제된 안정감과 명쾌함을 보여주고자 했다.”


<윤서체 아카이브>에 소개된 ‘소망’ 소개 페이지

다시 설명하자면, 명조체의 특징인 세리프와 고딕체의 특징인 직선적인 획, 이 두 가지의 대립되는 요소를 혼합하되 안정적이면서도 명쾌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 소망체만의 디자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곧 기존 폰트들과는 차별화된 디자인 특징이 될 수 있었고, 이를 알아본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소망체는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폰트가 될 수 있었다.


명확한 콘셉트와 네이밍 전략

두 번째는 ‘명확한 콘셉트’라고 할 수 있다. 이실직고하자면, 90년대는 ‘기획’보다는 ‘감각’에 의존한 폰트들이 대다수였던 게 사실이다. 디자인 콘셉트는 디자이너 개인의 감각을 바탕으로 추출되었고 해당 디자이너가 생각하는 네이밍이 그대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소망체 이후로 조금씩 변화된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딕과 명조라는 두 가지 상반된 서체가 자연스럽고 균등하게 혼합된 소망체는 콘셉트와 메시지가 명확한 만큼 전달방식이 분명했고, 이것은 디자인 시장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세 번째는 (사실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운’도 따랐다. 당시 소망체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국내 수많은 종교 단체들의 호응 때문이기도 했다. 일부러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폰트 네이밍이 ‘소망’이라는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만 해도 폰트 네이밍이 마케팅에 미치는 영향력이 엄청 컸다는 것을 보여준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90년대 윤디자인연구소에서는 폰트 개발 못지 않게 네이밍에도 엄청난 공을 들였다. 물론, 폰트 자체 퀄리티가 뒷받침되었다는 확실한 전제 하에.


1997년 제작된 윤서체 매뉴얼 <윤놀이> 중 ‘소망’체 소개 페이지.
‘소망’체 네이밍을 ‘고통’으로 표현한 이미지가 아이러니하다.

소망체의 업그레이드 버전

2012년 소망체는 ‘소망2’로 업그레이되었다. 무려 20여 년만에 새롭게 변화된 것인데, 폰코 사이트에 소개된 ‘소망2’에 대한 설명은 이러하다.

“소망2는 담백한 곡선과 절제된 직선을 활용해서 전보다 훨씬 세련된 표정으로 거듭났다. 가독성이 좋아진 것은 물론이고, 본문용으로 적합한 L과 M, 제목용으로 더 강하게 힘을 준 S로 용도를 선명하게 정돈하였다.”

90년대 후반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변화 못지 않게, 2000년대 디지털 기술의 고도화 또한 미디어 환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소망체 역시 2000년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맞춰 ‘소망2’로 변화했다. ‘고딕과 명조의 융합’이라는 콘셉트는 그대로 유지하되, 지금의 미디어 환경(책, TV,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에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디테일한 수정을 거듭했다. 특히, 굵기에 있어 기존 Bold 보다 제목용으로 사용하기에 더 용이하도록 두께를 더한 Special을 새롭게 추가해 변화를 추구했다.




폰코 사이트 ‘소망2’ 소개 페이지 일부
 

▶ ‘소망2’ 자세히 보기 : 콜렉션폰트상세보기 | FONCO

고딕과 명조의 융합은 90년대 소망체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로 이와 비슷한 계열의 폰트들이 여러 곳에서 발표되었다. 그리고 ‘고딕과 명조의 융합’이라는 주제는 지금도 윤디자인그룹에서 세부적인 기획을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고, 2022년 새롭게 발표될 윤디자인그룹 신서체 중 하나가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90년대를 관통한 2020년대 새로운 고딕과 명조의 콜라보 결과물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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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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