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석훈의 백 투 더 90, 제3회 ‘회상’ 2022.02.17

90 년대 발표된 한글 폰트들을 통해
누군가에겐 당시의 초심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를!


수 년 전 독일 베를린으로 출장을 다녀온 직원이 작성한 출장보고서에 유독 눈에 띄는 사진들이 있었다. 바로 수동 타자기였다. 

유럽 최대 디자인 콘퍼런스로 꼽히는 ‘타이포 베를린(Typo Berlin)’에 참여했던 그 직원은, 이 행사 외에도 베를린의 유명 박물관들을 다녀왔고, 그 중 하나가 독일기술박물관(Deutsches Technikmuseum)이었다. 보고서에는 “Printing 전시 공간에는 활판인쇄기계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 타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적혀 있었는데, 타자기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나는, 관련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독일기술박물관에 전시된 수동 타자기


최근 레트로 열풍에 힘입어 빈티지 제품이나 엔틱 제품으로 선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수동 타자기는 무척이나 낯선 물건일 것이다. 불과 30년 전인 1990년대만 해도 컴퓨터가 일상화되기 전이어서 대부분의 사무실에서 문서 작업은 타자기로만 작성될 수 있었다. 타자기 시대를 겪은 이들에게는 타닥 타닥 소리를 내며 종이에 찍혔던 한 글자 한 글자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있을 것이다.
 
갑자기 타자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회상’체 때문이다. 회상체는 타자기 글자꼴을 기본으로 작업된 폰트다. 1994년 처음 발표할 당시 ‘조합형 글자를 닮은 복고풍 서체’로 소개되었는데, 2022년 지금도 역시 회상체는 과거를 회상시키는 대표적인 복고풍 서체로 손꼽히고 있다.





타자기 글자꼴의 복고풍 질감, 회상

<윤서체 아카이브>에 설명된 회상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조합형 서체의 타자기 글자꼴의 구조를 기본으로 제작하였으나 글자의 표정은 과거를 회상하는 복고풍의 질감을 더하였다.
글자 구조는 줄에 걸린 빨래의 형태라 하여 빨랫줄 글씨 형태이며 실질적인 제작은 글자 하나하나의 완성도를 고려하여 변화 속에서 정돈감을 주었다.”


<윤서체 아카이브>에 소개된 회상체 소개 페이지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특징적인 단어는 두 가지다. 바로 ‘조합형’과 ‘빨랫줄 글씨’. 우선, 네이버 국어사전(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조합형에 대한 설명은 아래와 같다.

조합형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에 각각 5비트씩의 고유한 코드를 부여하고 이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글자를 나타내는 2바이트 문자 코드 방식(반대어 완성형)

완성형
전산 조판이나 워드 프로세서의 한글 글자형의 하나. 한글 글자를 음절 단위로 한 자씩 도안하여 컴퓨터에 저장하였다가 출력하면 그대로 화면이나 프린터에 나타나도록 하는 방식이다.

쉽게 다시 설명하자면, 조합형은 한글 초성, 중성, 종성 각각의 글자 요소들을 일정한 스타일로 만들어 이것들을 각각 조합하는 것이고, 완성형은 글자 하나 하나를 모두 별도로 만들어 완성하는 것이다. 이렇듯 조합형의 장점은 완성형에 비해 제작기간이 단축되는 반면 글자 하나하나마다 변형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비해, 완성형은 작업 기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지만, 글자마다 디자이너의 의도대로 변형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지금은 조합형과 완성형에 대한 갑론을박이 그다지 존재하지 않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조합형과 완성형을 놓고 논쟁이 많았다. 이것은 컴퓨터가 도입된 이후 한글 코드 체계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되었던 것인데, 컴퓨터 한글 코드 체계가 완성형으로 통합되면서 이에 대한 논쟁도 사그라들었다.

빨랫줄 구조란 아래 예시에서 보는 것처럼, 마치 글자들이 빨랫줄에 걸려 있는 모습에서 파생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 역시 타자기 글꼴에서 가져온 것이다.



회상체 빨랫줄 글씨 구조 예시


회상체의 가장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는 면은, 조합형 형태를 갖고 있음에도 실제 제작은 완성형으로 했다는 것이다. 구조 역시 빨랫줄 글씨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글자 하나하나마다 글자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완성형으로 제작되었다.

회상체 제작에 있어 가장 어려웠던 점은 타자기 인쇄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었다. 당시 기존의 서체들이 매끄럽게 정리된 것들이었다면, 회상체는 종이에 인쇄된 타자기 글꼴 느낌 그대로를 살려 그 질감을 살리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이는 곧 기존 서체들보다 몇 배 이상의 메모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메모리를 최대한 줄이면서 질감 표현이 단조롭게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수많은 조판 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1997년 제작된 윤서체 매뉴얼 <윤놀이> 중 회상체 소개 페이지



사용상의 편의를 더해 업그레이된 회상II

회상체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회상II’는 1998년에 발표되었다. 아래 내용은 폰코 사이트에 소개된 회상II에 대한 설명이다.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 위에 가만히 올라 앉는 단정한 자막의 감성. 
회상II체는 마치 타자기로 쓴 글씨처럼 아날로그한 매력을 가득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회상II체로 무언가를 적을 때는 조심해야 해요. 나도 모르게 과거로 훌쩍 시간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회상II의 가장 큰 특징은, 모니터 화면에 보여지는 비트맵 폰트(bitmap font)와는 달리 인쇄물로 출력했을 때 크기가 변한다는 문제점을 수정한 것이다. 이 역시 디자인 현장에서 지적된 문제들을 보완한 것으로, 화면에서 보여지는 글자와 출력했을 때의 글자가 같은 크기가 될 수 있도록 글자 하나 하나마다 스케일을 조정해서 문제점을 보완하였기에 회상II로 출시될 수 있었다.



회상과 회상II 비교


▶ ‘회상II’ 자세히 보기 : 콜렉션폰트 상세보기 | FONCO

회상II만큼 과거로의 여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폰트가 있을까? 회상II가 이렇듯 손쉽게 우리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형태는 예전의 글꼴을 취했을지라도 사용자가 가장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제작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회상II는 꾸준히 복고풍을 대표하는 서체로, 그리고 우리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랑받는 서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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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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