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석훈의 백 투 더 90, 제4회 ‘봄’ 2022.03.17

90 년대 발표된 한글 폰트들을 통해
누군가에겐 당시의 초심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를!


‘봄’체는 지난 2회에 소개한 바 있는 ‘겨울’체와 마찬가지로,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순차적으로 발표한 ‘봄·여름·가을·겨울’ 시리즈 서체 중 하나이며, 필기체 붐을 일으킨 대표적인 폰트다. 겨울체에서는 필기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했다면, 오늘은 그 제작 과정에 주안점을 두고 봄체를 기록해보려 한다.





크레파스 질감의 필기체, 봄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시리즈 서체를 제작하는 과정은 사실 무척이나 복잡하다. ‘봄·여름·가을·겨울’ 모두 “필기체에 대한 향수를 부추겨 사용자와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전략 아래 시작되었지만, 각각의 구체적인 콘셉트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는 ‘차별화’라는 벽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또한, 소비자들의 기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자칫 구색맞추기 정도에서 그칠 수도 있다.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를 공개하자면, 사실 봄체는 ‘봄·여름·가을·겨울’ 시리즈 서체 중 가장 늦은 1996년 4월에 정식 발표되었다(여름체와 가을체는 1995년 6월 발표). 4계절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봄이기에 가장 먼저 발표하려 했으나, 콘셉트 표현도 쉽지 않았고 차별화된 표현에서도 꽤나 어려움을 겪었다. 그만큼 시행착오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봄체 제작 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996년 가을에 발간된 타이포그래피 전문지 <정글> 기사를 통해 전하고자 한다. 예전부터 사용하던 구조나 조형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감히 탈피하기 위해 노력한 제작 과정을 오롯이 살펴볼 수 있다.  



<정글> 제2호(1996년 가을호)에 소개된 ‘봄’체 페이지. 20~21p

“먼저, 대중들이 떠올리는 ‘봄’에 대한 이미지들을 찾아내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새싹이나 병아리, 아지랑이, 꽃잎, 화사함, 따사로움, 아이, 소생, 시작 등 주로 밝고 건강한 것들이 ‘봄’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었다. 봄은 생기와 활력을 요구하는 신선한 시기이며, 첫 출발을 암시하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계절감에 어울리는 사용자층은 10~20대로 설정되었고, 그들의 톡톡 튀는 감성에 호소하기로 했다.

다음으로 구조적인 문제를 고민하였다. 여기서부터 나머지 ‘여름, 가을, 겨울’과의 연계선을 고려해 타협점을 찾아야 했다. 또 각각의 계절감에 맞는 표정과 구조, 표현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여름’과 ‘가을’은 네모꼴 탈피와 윗줄맞춤(빨래줄 구조) 형식으로 질감이 없는 시원스러운 구조다.(빨래줄 구조에 대한 설명은 제3회 ‘회상’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에 반해서 ‘봄’은 글줄에 집착하지 않기로 하고, 탈네모꼴이면서도 무게 중심을 글자의 중간 위치에 둠으로써, 구조의 과도기적 입장을 취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필기체의 고유한 특성들을 바탕으로 하여, 우선 필기의 주체는 봄이 가지고 있는 활력이나 신선함 등의 이미지와 걸맞는, 편지를 자주 쓰는 사춘기의 소녀나 글씨를 서툴게 쓰는 아이로 정했다.

다음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느냐 하는 것인데, 톡톡 튀는 뉘앙스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으로 매끈한 획 처리보다는 질감 표현이 나타나는 도구가 적절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최선의 선택으로 크레파스로 질감이 있는 종이에 글씨를 쓴 듯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질감 표현 문제는 봄의 이미지를 주도하는 요소이므로 간과해서는 안될 부분이었기 때문에, 작업을 하면서도 계속 연구해야 할 주요한 항목이었다. 유희적이고 참신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구조를 염두에 둔 1차 시안 과정이 끝나자 2차 과정부터는 질감 표현을 살린, 실현 가능한 시안이 마련되었다.
(중략)
요철이 심한 질감 표현도 산만한 느낌을 주는 데에 한몫을 했다. 한 마디로 글꼴 한자한자마다 지나친 과욕을 부린 것이다. 다시 작업에 들어가 전면적인 수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글 표정은 그대로 유지하되 지나친 표현들(질감 표현, 꼭지점, 초·중·종성의 대소차, 교차 돌기 등)을 절제하면서 균형감을 찾는 데에 노력하였다. 특히, 이 가운데 질감 표현을 연출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정이었다.

Light는 획 자체 굵기가 가늘어 도드라진 질감 표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상승 효과를 유도했지만, 획이 굵어질수록 요철이 심한 질감 표현이 가미되어 글꼴을 24포인트 이상 크게 했을 때는 눈에 거슬리는 역작용이 일어났다. 그래서 Medium과 Bold 굵기로 갈수록 획의 점을 줄여주는 등 지나친 굴곡을 완만하게 처리해 조형상의 조화를 꾀하였다. 

봄체의 특성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정형화된 글줄에 얽매이지 않는 흐르는 듯한 가독성
 컴퓨터가 주는 인공미를 배제한 자연스러운 ‘손멋’ 추구
 크레파스를 질감이 있는 종이에 대고 그은 느낌을 살림으로써 ‘봄’의 생기를 표현
 서툴면서도 정성 들여 쓴 듯한 유희적인 모양새”
1997년 제작된 윤서체 매뉴얼 <윤놀이> 중 봄체 소개 페이지

이렇듯 봄체는 '손멋이 느껴지는 자연스럽게 쓴 듯한 필기체 스타일’과 ‘서툴지만 정성 들여 쓴 듯한 느낌을 살린 크레파스 질감’을 특징으로 제작되었다.


봄체 특징


손글씨의 매력이 가득 담긴 봄II

봄체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봄II’는 1998년에 발표되었다. <윤서체 아카이브>에 설명된 ‘봄II’체에 대한 설명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필기체의 특징인 자연스럽게 흐르는 듯한 느낌에 가독성을 부여하고 컴퓨터가 주는 인공미를 배제하여 ‘손 멋’을 추구하였다. 크레파스를 질감 있는 종이 위에 대고 그은 듯한 느낌, 서툴면서도 정성 들여 쓴 듯한 모양새을 하고 있다.”


<윤서체 아카이브>에 소개된 봄II체 소개 페이지


그리고 아래 내용은 폰코 사이트에 소개된 봄II에 대한 설명이다.
“봄에는 어쩐지 동화 속 세상을 살아가는 기분입니다.
그런 느낌을 살려 제작한 봄II체에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감성이 듬뿍 담겨 있지요.
봄바람 솔솔 부는 날, 손글씨의 매력이 가득 담긴 봄II체를 꺼내 따뜻한 메시지를 적어보세요.
분홍 꽃잎이 그 위로 후두둑 쏟아지는 동화 같은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르잖아요?”






봄II의 가장 큰 특징은, 모니터 화면에 보여지는 비트맵 폰트(bitmap font)와는 달리 인쇄물로 출력했을 때 크기가 변한다는 문제점을 수정한 것이다. 봄II 역시 디자인 현장에서 지적된 문제들을 보완한 것으로, 화면에서 보여지는 글자와 출력했을 때의 글자가 같은 크기가 될 수 있도록 글자 하나 하나마다 스케일을 조정해서 문제점을 보완했다.


봄과 봄II 비교


▶ ‘봄II’ 자세히 보기 : 콜렉션폰트 상세보기 | FONCO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를 추가로 공개하자면, 기획 당시의 포부와는 달리 ‘봄·여름·가을·겨울’체가 시장에 공개된 이후 반응이 즉각적이지 않아서 판매에 애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 제목용 서체에 대한 당시의 고정관념 때문이었는지, 봄·여름·가을·겨울체가 발표되고 나서 1년이 지나도록 어느 곳에도 쓰이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출판물에 쓰이기 시작하더니 봄·여름·가을·겨울체가 광고와 미디어 분야에도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봄체의 인기가 엄청났는데, 수많은 출판물에서 본문용으로 쓰이는 센세이션을 가져오기까지 했다.
 
고정관념을 탈피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고정관념을 탈피해야 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숙명과도 같다. 고정관념 탈피란, 곧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명조체와 고딕체가 본문으로만 쓰이던 당시에 봄체가 본문용으로 쓰일 수 있었던 까닭은, 기획 단계부터 고정관념을 탈피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에게 다가오는 봄체는, 따스한 봄날의 느낌 보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애썼던 당시의 치열함을 떠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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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저서로는 <한글 디자인 품과 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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