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석훈의 백 투 더 90, 제7회 ‘신라’ 2022.06.16

90 년대 발표된 한글 폰트들을 통해
누군가에겐 당시의 초심을,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디자인 크리에이티비티를!


고구려’체와 ‘백제’체에 이어, 오늘 다루는 폰트는 바로 ‘신라’체다. 앞서 고구려체는 ‘한국적 디자인 모티브’를, 백제체는 ‘디자인 기획의 중요성’을 화두로 다루었다면, 이번에는 '한국적 디자인을 폰트로 표현하는 방법‘을 통해 신라체를 다루어보려 한다. 






한국적 디자인을 폰트로 표현하는 세 가지 방법

‘고구려·백제·신라’ 시리즈 서체는 90년대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시대적 이슈에 부응해 한국적인 이미지를 폰트로 구현해낸 시리즈 서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했던 가장 중요한 주제는 ‘한국적인 디자인을 폰트로 어떻게 표현해낼 것인가’였다. 그리고 이 주제는 90년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우 중요한 숙제이며, 여전히 풀기 어려운 난제이기도 하다. 윤디자인그룹에서는 이 주제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보았는데, 그동안 진행한 대표적인 프로젝트들을 연계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 번째는 옛 활자를 ‘복원’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한글 고문서나 옛 활자를 디지털 폰트로 복원하는 작업인데, 이렇게 복원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저자가 저술한 <한글 디자인 품과 격>에서 다룬 바 있어 일부 인용한다.

“윤디자인그룹의 전신인 윤디자인연구소는 한글 디지털 폰트 사업, 즉 한글 ‘디자인’으로 시작한 회사다. 디자인에 방점을 둔 이유는 한글 자체를 연구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한글의 조형성을 디자인으로 풀어내서 디지털화하는 데 중점을 둔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글의 조형성에 대한 평가나 정의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다. 한글의 독창적인 조형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글 낱자의 특징, 한글 모음과 자음의 공간 조형성, 문장에서의 가독성 등 끊임없이 논의되어야 할 사항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윤디자인그룹은, 우리가 다소 막연하게 인식하고 있는 한글의 조형적인 특징을 최대한 수학적 증명이 가능한 형태로 표현해내야 한다는 걸 숙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한글을 제대로 알리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왔다.
전통 한글의 복원 역시 이 맥락에 닿아 있다. 아니, 어쩌면 이 방법이 한글의 조형성을 파악하는 첫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단순히 복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현대화하는 작업이 필수로 수반되어야 제대로 한글 디자인의 우수성을 알리는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말로만 한글을 치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한글의 가치와 그 가치의 쓰임을 실제로 보여주어야 제대로 된 ‘한글 문화’를 파생시킬 수 있기에, 전통 한글의 복원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한글 디자인 품과 격> 66~68p 중 일부 발췌

이러한 기획 의도하에 작업된 전통 복원 폰트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월인석보·간이벽온방·전통문양 등의 한글 고문서 디지털 복원 작업과, 전통 전각을 모던하고 세련되게 재해석한 ‘고암새김’, 옛 활자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곳은붓·어진붓’ 등이 있다.


복원 폰트 대표 사례. 월인석보·간이벽온방·전통문양(왼쪽)과 고암새김(가운데), 곳은붓·어진붓(오른쪽)

두 번째는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2010년대에 작업한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는 지금 다루고 있는 고구려·백제·신라체와 마찬가지로 '역사 시리즈 서체’라고 할 수 있는데, 표현에 있어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에 대한 설명 역시 <한글 디자인 품과 격>에서 다룬 바 있어 일부 인용한다.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는 요컨대 ‘서체’라는 대상과 ‘대한민국 독립의 역사’라는 가치를 배치/조합한 기획물이다. 일단 큰 범주의 개념이 이러하고, 여기에 속하는 하위 범주들(대한체·민국체·독립체·만세체) 또한 ‘대한민국 독립의 역사’에 상응하는 서체 각각의 특성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만 4종의 서체는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의 완전체로서 제 색깔을 낼 것이다.
서체 4종은 프로젝트명의 서체 이름순대로 차례차례 완성되었다. 맨 먼저 세상에 나온 것은 2014년 대한체다. 바탕체(명조체)를 기본 골격으로 한 본문용 서체다. (...) 두 번째 서체 민국체는 ‘온 국민이 함께 쓰는 본문용 돋움체’를 표방하며 2018년 무료 배포되었다. (...)
2019년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체와 만세체가 선을 보였다. (...) 나와 직원들이 잡아두었던 대략의 방향성은 이러했다. 대한체와 민국체가 본문체였으니 독립체, 만세체를 제목체로 구성해 ‘본문용 대한·민국, 제목용 독립·만세’의 균형을 이뤄보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립체와 만세체는 대한·민국에 비해 강렬하고 힘 있는 장식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
대한체의 ‘화합’, 민국체의 ‘소통’, 독립체의 ‘의지’, 그리고 만세체의 ‘외침’, 대한민국독립만세 프로젝트는 7년(2013~2019)에 걸쳐 우리 민족의 역사의식을 고양하는 4종의 서체, 네 가지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했다. 거꾸로 말해보면, 화합·소통·의지·외침이라는 네 가지 가치가 4종 서체에 각각 배치/조합됨으로써, 존재 자체로 그 가치를 빛내는 ‘역사 서체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 <한글 디자인 품과 격> 18~24p 중 일부 발췌


대한·민국·독립·만세체 포스터

세 번째는 연상되는 이미지를 폰트로 ‘재현’하는 것이다. 신라체를 예로 들어보면, 작업 과정은 이러하다. 우선, 신라시대 하면 연상되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모은다.


신라시대 이미지 모음

그리고 이 이미지들에서 연상되는 키워들을 추출한다. 섬세함, 단아함, 화려함, 세련미, 유려함 등등 신라시대와 연관된 키워드들을 정리한 후, 고구려체와 백제체와는 차별화되는 콘셉트를 설정한다. 이러한 기획 과정을 통해 우리가 설정한 신라체의 콘셉트는 바로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서체’였다. 

이 콘셉트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디자인 방향을 세우게 된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뚜렷한 대비, 끝이 날카로운 선, 곡선을 사용한 부드러우면서도 화려한 표현 등을 주제로 1차 아이데이션 시안들이 제작되었고, 이 중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이 뚜렷하면서도 신라의 분위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된 서체로 최종 시안을 확정했다. 이후 수차례 수정 작업을 거친 후에 신라체가 완성되었다.


유려하고 섬세한 멋을 담아낸 신라체

<윤서체 아카이브>에 설명된 신라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고구려의 힘차고 강한 느낌과 백제의 부드럽고 예스러운 느낌과는 차별화되도록 유려함과 섬세함, 그리고 간결하면서도 날카로운 느낌을 강조했다. 
탈네모꼴의 윗줄 맞추기로 가로획과 세로획의 뚜렷한 대비와 날카로운 선으로 경쾌한 느낌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윤서체 아카이브>에 소개된 신라체 소개 페이지


1997년 제작된 윤서체 매뉴얼 <윤놀이> 중 신라체 소개 페이지

아래 내용은 폰코 사이트에 소개된 신라체에 대한 설명이다.

“화려하고 섬세한 빛으로 반짝이는 금관 문화를 품고 있는 신라. 그 유려하고 섬세한 멋을 그대로 담아낸 폰트입니다. 
탈네모꼴이지만 윗줄을 가지런히 맞추어 자유로운 동시에 단정한 느낌을 살렸고, 흐르는 듯한 곡선 표현으로 섬세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했습니다.”



같은 주제로 같은 노력을 했다고 하더라도 디자인 시장에서 인정받는 서체는 따로 있는 법이다. 고구려·백제·신라체 중에 고구려체는 상당한 인기를 얻었고, 이에 비해 백제체와 신라체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고구려체는 고구려의 강하고 역동적인 이미지가 연상된다는 평가를 받은 반면, 백제체는 개성이 약하고, 신라체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고구려·백제·신라체에서도 반면교사해야 할 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역사를 주제로 한 서체를 개발할 때나 혹은 시리즈 서체를 제작할 때, 끊임없이 연구하고 더 주의 깊게 수정, 보완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이런 점에서 윤디자인그룹의 한국적 디자인 찾기 작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신라’ 자세히 보기 : 콜렉션폰트 상세보기 | FONCO


㈜윤디자인그룹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우리 문자 한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꾸준한 본문체 프로젝트, 국내외 유수 기업들과의 전용글꼴 개발을 이끌어 오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한 브랜딩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윤디자인그룹의 정체성을 기존의 글꼴 디자인 회사에서 타이포브랜딩(typo-branding) 기업으로 전환했다. 저서로는 <한글 디자인 품과 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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