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북마크] ‘스킵 리스크’를 스킵하는, 텍스트 콘텐츠의 지속성2022.08.16




 북마크를 시작하기 전에 
 곱씹어볼 키워드 셋 #스킵리스크 #의천도룡기 #카운트다운

최근 신간 중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제목이 『스티커 메시지』(김병희 지음, 한국경제신문, 2022)다. ‘스킵되지 않고 착착 달라붙는 말과 글을 만드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제목보다 부제에 눈이 갔다. 특히 ‘스킵(skip)’이 눈에 밟혔다. 텍스트, 이미지, 영상 할 것 없이 작금의 콘텐츠들이 존재 증명을 하려면(대중에게 구독·감상·시청되려면) ‘스킵 리스크’를 극복해야 한다. 갓 발행된 콘텐츠들 중 과연 스킵되지 않는 사례는 얼마나 될까. 짐작하건대 갓 부화한 새끼 바다거북의 생존율과 비등하거나 조금 높은 정도 아니려나 싶다. 언급한 책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들, 그중에서도 ‘말과 글’을 다루는 이들에게 스킵이라는 천적을 우회하는 일종의 회피 기동을 강론하는 내용이리라 지레짐작해본다.(아직 완독 전이다.)

위 책이 제시하는 회피 기동술은 단순성(simplicity), 표적화(targeting), 흥미성(interesting), 구체성(concreteness), 핵심어(keyword), 정교화(elaboration), 상관성(relevance), 이렇게 일곱 가지다. 즉발의 효능감을 요하는 상업 또는 공익 목적의 카피, 제한된 분량 안에서 사업 아이디어와 전략을 수완 있게 전달해야 하는 사무 문서 등 실용적 문한들에 최적화된 공식이라 할 수 있다. 다종다양한 텍스트 콘텐츠를 위한 보편의 작법으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해도, 글 쓰는 직능인이 숙련해야 할 기초 제식임에는 틀림없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물론, 제식 훈련으로 익힌 기동과 놀림이 실전에서 일백 퍼센트 효용성을 발휘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대목에서 언론인 겸 작가 김용(金庸, 1924~2018)이 쓴 대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고 싶다. 주인공 ‘장무기’의 노사부 ‘장삼봉’이 목검을 쥐고 비기 태극검법의 쉰네 가지 초식을 전개하며 제자와 주고받는 문답이다.

   “얘야, 똑똑히 보았느냐?” // “예! 똑똑히 봤습니다.”
   “모두 기억했느냐?” // “벌써 반은 잊었습니다.” // “좋다 그것도 힘들었을 게다. 너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해라”
    
   “지금은 어떠냐?” // “이미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 
   “무기야, 지금은 어떠냐?” // “태사부님, 이제 모두 잊어버렸어요. 깨끗하게 잊어버렸어요.” // “나쁘지 않구나, 나쁘지 않아! 잊어버리는 것이 정말 빠르구나. 훌륭하다! 가서 팔비신검에게 몇 수 배워라!”

   ✻ ✻ 위 인용문은 출판사 고려원의 『소설 영웅문』 제3부 4권 4판(1997. 6. 10.) 288~289쪽에서 발췌한 것이다. 본래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등 김용의 세 대하소설을 묶어 ‘사조삼부곡’이라 칭하는데, 고려원은 이를 『소설 영웅문』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1986년 3부작(제1부 몽고의 별, 제2부 영웅의 별, 제3부 중원의 별) 초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출판사 김영사가 ‘사조삼부곡’ 정식 판권 계약을 체결하며 원제를 유지하고 새로 완역한 3부작 스물다섯 권을 2000년에 펴냈다.

초로의 고수가 힘들여 신공을 전수하는데 어린 제자는 ‘반은 잊었다’, ‘거의 다 잊었다’, ‘이제 깨끗이 잊었다’ 답하고, 이에 사부가 극찬하는 장면이다. 일별하기로는 가히 엉뚱한 상황이겠으나 곱씹을수록 사제지간 선문답이 오묘한 맛을 남긴다. 태극검법 54식을 똑바로 보고 익히되 그것을 유일무이한 절대 가치로는 여기지 말라는 사부의 의도가 읽히기 때문이다. 다이얼로그 마지막에 언급되는 ‘팔비신검’은 한 검호(劍豪)의 이름이고, 사부 장삼봉은 태극검법 전 초식을 말끔히 잊어낸 제자 장무기에게 또 다른 고수와의 대련을 제안하며 교시를 마친다.

강호의 최강 검법으로 알려진 초식일지라도 그것에 과몰입하지 말 것, 자신이 그 기술을 익혔더라도 ‘내가 이 기술을 익혔다’라는 과잉된 자존감으로부터 벗어날 것, 그리하여 계속 새 스승과 새 배움을 찾아 나설 것, 궁극적으로 ‘나만의 초식(나만의 콘텐츠!)’을 완성할 것. 요컨대 이런 메시지를 위 인용문의 장면은 담고 있다.

······그리고, 사부 장삼봉의 이 깊은 뜻은 결코 ‘카피’나 ‘섬네일’의 형태로 전달될 수 없고 책(글)을 차근히 읽어나간 독자들만이 친견할 수 있는 ‘텍스트 속 텍스트’라는 점, 앞뒤 구문과 맥락과의 결합·화학 작용으로써만 비로소 콘텍스트의 힘이 폭발한다는 점 또한 주지해야 할 사실이다. 사부는 다만 해야 할 말을 해야 하는 방식으로 할 뿐이고, 그 말을 취하건 스킵하건 선택은 오롯이 제자의 몫이다.

요컨대 애초에 스킵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해질 수 없는 차원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로켓 발사가 그러하다. 추진체 충전부터 비행경로 설정 및 확인, 발사 시퀀스 작동, 발사체 전원 장치 점검 등에 이르는 수 시간 혹은 수일의 과정, 즉 ‘카운트다운’ 절차를 스킵한 채 로켓을 발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텍스트 콘텐츠의 경우라면, 콘텍스트의 추진력이 예열되고 가동되는 데 필요한 카운트다운을 스킵해버리고서는, 그 글 안에서 아무런 우주도 열리지 못할 것이다.


 북마크를 시작하며 
 새끼 거북의 카벙클: 왜 하필 이빨인가 

텍스트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은 스킵 리스크를 스킵할 필요가 있다, 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스킵되지 않는 말과 글의 비책을 익혀두기는 하되, 때로는 그조차도 다 잊고 한 문장 한 문장 ‘콘텍스트의 카운트다운’을 충실히 따르는 자신만의 가장(佳章)을 쓰려는 기백과 필력 겸비에 집중하자, 라고 말한다면.

산란기 바다거북 모체는 한 번에 100여 개 알을 낳는다. 이 알들 중 여덟 개 정도만이 미래를 보장 받는다. 새끼 바다거북이 성체가 되는 확률은 약 8퍼센트. 바다거북의 한 종이자 멸종위기종인 켐프리들리 바다거북(Kemp’s ridley sea turtle)은 더 가혹한 운명을 타고난다. 단 1퍼센트만 종의 미래를 간신히 잇는다.

새끼 바다거북의 생존율을 낮추는 요인은 외부에만 있지 않다. 거북 스스로 알을 깨지 못해 알 안에서 죽는 일도 허다하다. 이를 극복하려는 거북의 노력이 이른바 카벙클(carbuncle)이라는 것이다. 우리말로는 ‘임시치아’라고 하는데, 알 안에서 새끼 거북은 일종의 임시방편책 이빨을 지니게 된다. 이걸로 알 외벽을 물어뜯어 탈피한다고 한다. 왜 하필 이빨일까. 어째서 이빨 하나뿐일까. 비록 일시적이겠지만 이빨과 더불어 두각이나 날개까지 가졌다면 알을 뚫고 바다로 나아가는 노정의 리스크가 훨씬 감소했을 텐데. 뿔 때문에 조류 같은 천적의 공격 성공률은 줄어들고, 날개를 단 거북 자신의 회피 기동 능률도 비상할 것이니 말이다. ······무의미한 가정법이다. 바다거북은 임시치아가 최선의 카벙클일 수밖에 없는 종인 것이고, 여기에 ‘왜’를 따지는 건 실없다.


켐프리들리 바다거북 새끼
사진 출처: 미국 국립공원 관리청(U.S. National Park Service, NPS)

글을 씀으로써 자기 표현을 하는 크리에이터들에게 ‘왜 하필 글이냐’라고 반문하는 이, ‘요새 누가 글을 읽냐, 그러다 스킵 당하기 십상이다’라고 우려하는 이에게 들려줄 만한 해명은 무엇일까.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는 잘 모르겠다. 철학자 겸 미디어 연구가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의 주저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Die Schrift: Hat Schreiben Zukunft?)』를 펼쳐보기도 전, 제목 앞에서 이미 벙쪘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한다. ‘왜 하필 이빨이냐’라는 질문을 들은 새끼 바다거북처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모르겠어서, 그저 이빨로 알을 깐다. 그렇게 까고 나온 생태계에서의 생몰을 감당하기만도 벅찬데, 꾸준히 ‘왜 하필 뿔도 날개도 아닌 이빨이냐’라고 묻는 이들까지 상대할 여유가 없다. 그들을 천적으로 여기려는 적의를 품을 여력 또한 없다.

이제는 클리셰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미지 시대, 영상 시대라는 환경 속에서도 텍스트 콘텐츠는 지속되고 있다. 콘텍스트의 카운트다운을 엄수하면서 긴 시간을 들여 ‘하필이면’ 글을 계속 쓰는 크리에이터들이 멸종하지 않고 서식 중이다. 『타이포그래피 서울』 에디터도 그러한 종을 자처하는바, [에디터의 북마크] 시리즈에서 이따금 ‘텍스트 콘텐츠’와 ‘글’에 관한 견해를 밝히고, 동종 개체들의 활동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 편인 「‘읽는’ 콘텐츠를 위한 사이트들」에 이어서, 이번 편에서는 읽기로써만 가치를 온전히 발하는 텍스트 콘텐츠 시리즈들을 북마크했다. 콘텐츠 시장의 서슬 퍼런 스킵 리스크 이면에서, 누군가는 독야청청 저마다의 카벙클-이빨을 연마하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하필이면 글이라니!

에디터 임재훈
director@typography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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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건축신문

   북마크 ― 『건축신문』의 「등장하는 건축가들」 시리즈
   최근 눈에 띄는, 혹은 알려지지 않았던, 그동안 궁금했던 젊은 건축가를 포럼과 인터뷰 형식으로 알리는 연재물. “반복이 아닌 누적을 목표로” 동시대 젊은 건축가를 기록해 오고 있다. 단지 신진 건축가 소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보고 감각하는 건축 생태계의 모습과, 그런 그들을 주목하는 기성 건축인들의 입장까지 고루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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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건축신문

   북마크 ❷ — 『건축신문』의 「키워드」 시리즈
   청와대, 부실공사, 광화문광장 등 건축계가 주목해야 할 이슈 키워드를 제시하고 그에 대한 여러 건축인들의 견해(글)를 기록해 나가는 연재물. 이슈를 다루되, 이슈 자체보다는 그 이슈를 바라보는 건축인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기록해 나간다. 이슈의 시의성이 아니라 이슈를 대하는 이들의 연속성과 지속성에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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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디렉토리 매거진

   북마크 ❸ — 『디렉토리 매거진』의 「Knock, Please」 시리즈
   사무직 회사원, 디자이너, 자취생 등 일반 독자들의 동의를 얻어 각자의 거주 공간 정보(부동산 시세, 인테리어 비용 등)를 알려주는 인터뷰 시리즈. 누군가의 내밀한 거주 공간을 실측하고 계측하여 알려주는 콘텐츠인데 이상하게 불편하지가 않다. 오히려 그러한 실측값과 계측값은 거주자(인터뷰이)들이 말하는 저마다의 소중한 삶의 양식 앞에서 그저 조그마한 숫자로만 느껴져서 안심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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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현대식품관 투홈

   북마크 ❹ — 『현대식품관 투홈(to home)의 「현대식품문학」 시리즈
   식품류를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이 자체 기획한 시리즈로, ‘음식’이라는 대상에 ‘문학’을 입힌 콘셉트를 취하고 있다. 시인, 소설가, 뮤지션 등의 ‘음식 수필’들이 가득하다. 구매하러 들어왔다가 구독하게 만들고, 그래서 또 들어와 또 읽고 또 사게 만드는 전략이 통했던지, 시리즈 론칭 후 고객 1인당 쇼핑몰 체류 시간이 증가했다고 한다.*
   * 관련 기사: 「온라인몰 물건 속에서 문학의 맛이 느껴진 거야」, 한겨레, 2021. 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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