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의 글자발견 #7 카페 밖은 강릉2022.09.29




 발로 걸으며 다시 볼 견[見], 일상의 글자를 재.발.견. 
폰트 디자이너 한동훈의 글자 찾기 여행
 중앙시장 ― 월화거리 ― 동부시장 ― 안목해변 ― 그리고 카페들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도시 강릉. 강원도의 ‘강원’이 강릉과 원주의 앞 글자를 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강릉역 앞에 서서 관광객을 맞아주는 친구들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대회 마스코트 ‘수호랑’,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대회 마스코트 ‘반다비’의 대형 조형물이다. 날짜상으로는 가을이나 날카롭게 내리쬐는 햇살은 계절을 잊은 듯 이글거린다. 역 앞을 산책하는 짧은 순간에도 여행 온 사람들이 계속 역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원래 (영업 시간이) 여섯 시 반까지인데···. 이따 어디 모임 가야 해서 일찍 닫을 거라 여섯 시까지 저 앞에 세워두세요.” 역 근처 자전거포에서 한 대를 빌려 본격적인 구도심 탐방에 나섰다.


수호랑과 반다비는 강릉역뿐 아니라 안목해변에서도 사람들을 맞고 있었다


강릉 중앙시장 주변 글자들


유서 깊은 지역엔 으레 ‘중앙시장’이란 이름을 붙인 중심 상권이 있는 경우가 많다. 강릉에도 중앙시장이 있다. 요즘 지역 활성화 사례를 보면, 해당 지역의 고유 특산물이 아니더라도 인기 품목을 집중 육성해 명소화를 추진하는 일이 잦다. 강릉 중앙시장의 닭강정도 그 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꼭 과거의 기원이나 스토리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강릉 중앙시장은 유서 깊은 재래시장에 가깝지만 파리 날리는 전통시장을 생각하면 안 된다. 진입로부터 주차장을 방불케 할 만큼 복잡하다. 시장 거리 곳곳은 눈코 뜰 새 없이 몰려드는 젊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지상에서 닭강정을, 지하 어시장의 ‘훔친 물고기’라는 독특한 상호의 가게에선 숙소에서 저녁으로 먹을 회를 포장했다. 상호의 원제는 ‘(바다에서) 훔친 물고기’라 한다. 네이밍이 경쟁력이다. 최신 컨퍼런스 무대든 강릉 어시장 한복판이든 예외는 없다. 아 참, 순두부젤라또도 놓칠 수 없다.



강릉 중앙시장에서 발견한 글자들


중앙시장의 ‘훔친 물고기’

요즘 웬만한 시장은 전부 리브랜딩이 이뤄져 중심부에서 로컬 글자 찾기가 어렵다. 무료 혹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주목도 높은 제목용 서체가 시장 간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다. 중심은 아니지만 너무 멀지 않은 외곽 언저리 거리를 둘러보면 아직 남겨둘 만한 글자가 많다. 이 와중에 [바람.체]를 쓴 식당도 눈에 띄었다. 메이저 폰트 제작사가 아닌, 전공자나 마니아만 알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에 가까운 제작사의 서체를 적용한 것은 희귀한 경우다. 자전거로 골목골목 다니며 주목할 만한 글자를 수집했다.


[바람.체]를 사용한 식당

카메라가 크든 작든 자신에게 렌즈를 들이대는 타인에겐 본질적인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다. 모든 것에 일일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바로 앞의 ‘인간’을 무시한 채 무표정한 태도로 찰칵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것도 썩 좋지 못한 처사다. “안녕하세요. 저는 글자 만드는 사람인데요. 여기 간판 글자가 예뻐서, 사진 좀 찍어도 되나요?” “그러세요.” “왜 그런대?” “저거 찍고 싶데. 남대천 코너.” “저땐 컴퓨터가 없어가지고···.” 필자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강릉 주변에 있다. 시장에 모인 지역민의 대화를 듣다 보면 어릴 때부터 들어온 익숙한 억양에 마치 친척 수십 명이 말하는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강원도 사투리는 부산이나 대구의 그것처럼 타 지역 방언과 뚜렷하게 다른 단어나 억양은 없다. 그런데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고유의 톤이 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글자 ‘남대천 코너’


월화거리 동부시장


시장 근처에는 ‘월화거리’라 이름 붙여진 휴식 공간이 붙어 있다. 월화거리는 강릉 도심을 지나던 철로가 KTX경강선 개통으로 용도를 상실하자 그 2.6킬로미터 구간을 시민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조성한 거리다. 서울의 경의선숲길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월화거리 중간 남대천을 가로지르는 월화교가 겉모습은 영락없는 철교인데 인도교가 된 것도 철도가 오갔던 내력 때문이다. 중간중간 다양한 먹거리를 즐기며 산책하기 딱이라 급한 일정이 없다면 방문해볼 것을 권한다. ‘월화(月花)’라는 이름은 신라의 화랑이었던 무월랑과 강릉 출신 연화부인의 러브 스토리에서 따 왔다고 한다. 둘의 이름을 한 글자씩 땄다.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 『춘향전』의 원전이 된다고 하니 그 오랜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월화거리와 월화교

근처 옥천동에는 동부시장이라는 또 다른 시장이 있다. 감자전, 감자옹심이를 비롯한 야채와 건어물이 유명하다. 이곳도 재래시장이긴 하지만 몇 동의 콘크리트 건물이 합쳐진 모습을 하고 있다. 저층은 시장, 고층은 아파트로 된 주상복합형이다. 중앙시장과 달리 외지인의 왕래가 적어 1977년 건립 당시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삼각형 대지를 따라 브이[V] 형으로 늘어선 평면이 개성 있다. 글자가 아닌 건물 구조만으로도 둘러볼 가치가 충분한 장소다. 상아색 페인트가 그대로 남은 건물의 고전적 분위기에 공감한다면 내부 포차에서 술 한 잔 기울이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수도권이든 어디든 노포 분위기에서 잔이 더 쭉쭉 들어가는 듯한 느낌은 지역 공통이니까. 건물 1층 옷가게 앞 평상에서 친구와 마늘을 까고 있는 사장님의 모습이 정겹다.



중앙시장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품은 동부시장


콘셉트를 넘어선 진심, 강릉 카페들 탐방


강릉 명소를 찾아볼 때 눈길을 끈 곳이 카페 ‘애시당초’다. 간판부터가 자를 대고 그은 듯한 1970~1980년대 그래픽 디자인 트렌드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복고 문화에 대한 리서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은색 섀시로 된 출입문을 밀고 들어서자 가수 이용의 1집 앨범 재킷과 니코마트(Nikkormat) 필름 카메라가 맞아준다. 카운터 입간판과 나무로 된 발, 일력 같은 소품도 특색 있다. 복고에 진심인 공간이다.

한글과 한자, 커피 그래픽이 어우러진 입간판 디자인이 특히 마음에 든다. 복고 콘셉트 가게가 넘쳐나는 요즘이지만 복고 문화를 제대로 해석한 곳은 몇 군데 없다. 어설프게 해놓으면 정말 없어 보이는 것이 또 이런 콘셉트다. 그런 면에서 테이블, 코스터, 수저, 휴지 등 가능한 모든 것을 세트로 맞춘 애시당초는 전문가의 눈에도 합격점을 줄 만했다.

마지막으로 감탄한 부분은 컵이다. 여러 컵 중 노란색 로고타입에 꽃 모양 심벌이 있는 디자인이 있었다. 원색을 써서 외곽선을 깔끔하게 딴 대칭형 디자인은 1970~1980년대의 심벌 디자인 문법 그대로다. 어디를 가도 좀처럼 기념품을 사지 않는 필자도 이 컵만은 하나 구입했다. 요즘 이삼십년 전의 컵을 수집하는 것이 또 하나의 트렌드다. 컵은 제 용도로 쓰이든 아니든 참 매력 있는 오브제다.


복고에 진심인 카페 ‘애시당초’


애시당초 내부


필자가 구입했던 애시당초 컵

막국수로 식사를 해결하고 남쪽에 위치한 안목해변으로 향했다. 안목해변은 해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해안을 따라 형성된 커피거리로 더욱 유명하다. 보통 해변에는 횟집과 카페 비율이 비등비등한데 안목은 횟집이나 다른 업종 말고 카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전국에 카페 없는 도시가 드물기는 하나, 이곳은 어쩌다 카페로 유명해진 걸까?

일설에 의하면 해변가에 있던 커피 자판기의 맛이 독특하여 점점 유명해졌다고 한다. 여기에 ‘테라로사’ 본점이 문을 열어 커피도시 강릉의 이미지에 쐐기를 박았다. 안목해변의 기원을 찾다 보면 자판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전설의 자판기는 정확히 어디 있으며 무슨 모델일까? 그 자판기 앞에서 믹스커피 한 잔 하고 싶다. 지금은 자판기 대신 해변을 따라 늘어선 오션뷰 카페들이 관광객에게 커피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거대한 전면 창이 열린 가운데 바다를 바라보며 빵과 함께 마시는 커피 맛이 쏠쏠하다.


카페 밖은 바다, 안목해변


캘리그래퍼 주인장의 ‘새바람이 오는 그늘’


명주동 거리 한 구석, 어느 건물 2층에 ‘새바람이 오는 그늘’이 있다. 카페 이름이다. 깔끔하고 평범한 무채색 위주의 개인 카페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랑한다. 오후 한 시 십 분이라는 범상치 않은(?) 오픈 시간에 맞춰 방문했다. 내부는 어딘가 정돈되지 않은 듯하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편안한, 실로 어려운 목표를 달성하고 있었다. 카페 주인장은 평범한 인상 속에 의외의 연결고리를 숨기고 있다. 바로 캘리그래퍼 활동이다. 어쩐지 간판도 메뉴판도 그렇고 내외부에 손글씨가 상당하더라니. 주인장의 호는 ‘탕국’. 서양에서 커피가 처음 들어왔을 때 부르던 명칭 ‘양탕국’에서 딴 이름이라고. 양(洋)에서 온 탕+국. 마치 양잿물(가성소다)을 연상케 하는, 처음엔 낯설지만 뜯어보면 참 직관적인 작명이다. 캘리그래피로 된 외부 간판 글자는 스승님이 써 주셨단다.

카페 이름은 가수 조규찬·이준·김정렬이 1990년 결성한 그룹 ‘새바람이 오는 그늘’에서 가져왔다. 카운터에 CD를 전시해 놓아 이를 알 수 있다. 1990년 발매된 1집 LP의 재킷 타이틀 서체는 인간적인 손글씨로 되어 있다. 그러나 3년 후 뒤늦게 나온 CD 재킷 타이틀은 그 정반대인 기계적 성격의 조합형 탈네모꼴 서체로 바뀌었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쓰인 조합형 탈네모꼴은 1990년대 초중반 디자인의 주요 특징이다.

  높은 담벼락에 가린 작은 그늘 아래서 편히 기대어 앉아 우리들 노래하지 
  듣는 사람 없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우린 노래를 하지 
  이렇게 새바람이 오는 그늘 아래서
  키 큰 빌딩 속에 가린 파란 그늘 아래서 좁은 벤치에 앉아 우리들 얘기하네 
  조금은 답답하지만 너그러운 맘으로 우리 얘기를 하지 
  이렇게 새바람이 오는 그늘 아래서
  ― 그룹 ‘새바람이 오는 그늘’의 동명 발표곡(1990)

창가 자리 두꺼운 의자에 앉아 커텐을 걷고 창밖을 살폈다. 다방 커피를 재현했다는 시그니처 메뉴 ‘새바람커피’를 마시며 해바라기(이주호·유익종)의 1983년 앨범 커버 속 인물이 된 듯한 착각에 빠져본다. 오픈 시간보다 일찍 와서 기다렸다는 스몰토크 끝에 직접 쓴 작품 두 점을 선물 받았다. 해안가 도시의 한적한 시내에서 카페 운영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는 캘리그래퍼. 실로 낭만적이다. 물론 그 이면엔 말로 다 하기 어려운 고생이 있겠지만, 그런 쓸데없이 깊은 생각보다는 주인장이 마련해둔 좋은 공간을 즐겁고 멋지게 소비하는 것이 방문객으로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캘리그래퍼가 운영하는 카페 ‘새바람이 오는 그늘’


카페 곳곳 캘리그래퍼 주인장의 흔적들

명주동 시내와 떨어진 구정면에는 커피 전문점 테라로사 본점이 있다. 거대한 벽돌 공장을 리모델링한 강릉의 대표적 랜드마크 테라로사 본점에는 카페뿐 아니라 원두와 파생 상품을 파는 굿즈 가게, 커피 박물관, 식당 등이 같이 있다. 테라로사(Terarosa)는 포르투갈어로 ‘붉은 땅’이란 뜻이고, 브라질에서는 ‘희망이 있는 땅’이란 의미로도 쓰인다. 김용덕 대표가 2002년 고향(강원도 묵호)과 가까운 강릉에 1호점을 냈고 점차 지점을 늘려 가고 있다.

본점답게 넓은 대지에 방문객을 압도하는 건물의 스케일이 눈길을 끌었다. 단순한 카페 브랜드가 아니라 ‘커피’와 그에 관련된 문화 자체를 폭넓게 탐구하는 테라로사는 강릉을 커피 1번지로 인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중이다. 평범한 컨덴스드 산세리프(condensed sans sefif)로 된 로고타입이 오히려 각인 효과를 높인다.



강릉 테라로사 본점


‘다방’ 글자 해석파생


강릉 시내 옥천동 지하에 위치한 ‘동성다방’은 양식이 다른 재미있는 외부 간판을 여러 개 갖고 있다. 각 간판 글자마다 쉽게 보기 힘든 독특한 특징이 있어, 영상으로만 볼 수 있었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옛 거리가 그대로 눈앞에 나타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중 내부 층계참에 붙은 ‘다방’ 간판 글자를 파생 대상으로 선정했다. ‘다방’의 주요 DNA를 한번 살펴보자.



옥천동 ‘동성다방’의 간판 글자

  ▶︎ 획이 두꺼운 고딕 형태다.
  ▶︎ 중성 가로줄기가 맨 위쪽으로 정렬되어 있다.
  ▶︎ 중성 가로줄기의 끝이 사선으로 마감된다.
  ▶︎ 온자 아래쪽이 둥글게 마감되어 있어 로만 알파벳 대문자 U를 연상시킨다.
  ▶︎ [다]의 경우 초성과 중성을 아예 U자형 틀 안에서 이어버린 과감한 디자인이다.
  ▶︎ [방]의 경우 초성 비읍[ㅂ]은 비교적 평범하나, U자형으로 처리된 종성 이응[ㅇ]이 독특하다.
  ▶︎ 온자와 온자가 윗선 정렬로 이어져 있다. 다른 자소들도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틀 하나로 전체 문자열을 찍어낼 수 있는 구조다. 사인 제작상 편의를 위한 것일까?

DNA를 분석했다면 한글 파생 원리에 의해 다른 낱자도 만들 수 있다.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강원 강릉 옛 다방의 글자발견’이라는 견본 문자열을 제작해보았다. 참고할 만한 원본 글자의 양이 적은 데다 흔히 보기 어려운 형태라, 다양한 모임꼴을 만들려면 원본을 벗어나는 큰 폭의 해석이 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원본 글자가 지닌 요소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해결하기보다 하나의 참고 대상으로 활용하면서 창작하는 글자 가운데 원본의 요소를 자연스럽게 녹이기로 했다. 글자폭은 온자 간 너비 차이가 없는 고정폭, 각 960유닛(unit)으로 설정했다.

견본 문자열에 없는 글자라도 아래 설명을 참고하여 자신만의 해석과 응용을 해본다면 좋은 레터링을 만들 수 있다. 모티프가 개성적이면서도 제시된 온자의 양이 적어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동성다방의 ‘다방’을 바탕으로 제작한 견본 문자열

  ▶︎ 가로모임꼴: [자], [강], [발], [옛], [견]
  [자]의 초성 지읒[ㅈ]을 쉽게 가려면, 일자로 획을 쭉 내리다가 아랫부분에서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면 된다. 그러나 온자 아랫부분을 둥글게 통일한 원본의 룩을 지키고 싶었다. 이에 왼쪽으로 뻗었다가 급격하게 꺾어 아래로 보내는 형태로 디자인했다. 30여 년 전 로고타입에서 종종 보였던 디자인으로, 시대상까지 고려한 선택이다. 그중 한 예가 1989년 현대자동차 ‘엑셀’이다.


1992년 엑셀 TV 광고 화면
[셀]의 시옷[ㅅ]에서 필자가 언급한
“왼쪽으로 뻗었다가 급격하게 꺾어 아래로 보내는 형태”가 나타난다
― 캡처 출처: 유튜브 채널 n35a2

  [강]의 중성과 종성은 [방]에서 가져왔다. 초성 기역[ㄱ]은 초성과 중성의 윗선을 맞춘 원본 느낌을 유지했으며, 경직된 형태에 굴림을 가미해 통일성을 주었다. [방]의 초성 [ㅂ]이 모험적인 디자인이 아니므로 익숙한 형태를 지킨 것이다. 획 끝부분에는 원본에서 보이는 사선 맺음을 적용했다.

  [발]의 초성과 중성은 [방]에서 가져왔다. 문제는 종성 리을[ㄹ]인데, 밀도와 자소 디자인 모두 U자형 틀에 넣기엔 한계가 있다. 굳이 유지하려면 안 되는 것은 아니나 지나치게 평범해질 위험이 있다. 이럴 때는 기존 틀에서 나와서 규칙을 새로 세워야 한다. 기존에 U자 모양을 형성했던 종성 [ㅇ]은 사방이 막힌 구조다. 그러나 [ㄹ]은 맺음이 개방되어 있다. 이에 맺음을 급격하게 줄여 얇게 마무리했다. 딱딱한 글자에 강약을 주고 특정 자소에 무게가 과도하게 실리는 것을 방지하는 게 목적이다. 이때 맨 아랫부분의 곡률은 종성 [ㅇ]과 같을 필요는 없다. 비슷한 룩을 유지하기만 하면 된다. 중성과 종성은 이어 줌으로써 통일성을 유지했다. [방]에선 초성과 종성이 붙었지만 이 경우엔 불가능하기에 분리시켰다.

  [옛]은 원본에서 가져올 자소가 없으므로 완전히 새로 만들어야 한다. 일단 원본의 규칙만으로 적용할 수 없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사고를 유연하게 하는 것이 좋다. 중성 [ㅖ]의 맺음은 아랫부분을 둥글린 디자인에서 따와 U자형으로 만들었다. 두께는 기둥이 하나일 때와 달리 줄여 주었다. 초성 [ㅇ]은 평범한 원형으로 만들기보다, 원본에서 위쪽이 뚫려 있던 종성 [ㅇ]의 모티프를 응용하여 오른쪽을 열어주었다. 이로써 [ㅇ+ㅖ]로 쏠리기 쉬운 무게를 분산시키고 디자인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 종성 [ㅅ]도 새로 만들어야 한다. 무리하게 U자형 외곽선을 유지하기보다 정석적인 [ㅅ]으로 중심을 잡아주었다. 이미 초성과 중성이 충분히 독특하므로 온자 전체에 힘을 줄 필요는 없어 보인다.

  [견]의 초성은 만들어둔 [강]에서 가져왔으며 종성 니은[ㄴ] 디자인은 [발]에서 가져왔다. 종성 디귿[ㄷ] 역시 둥글게 뻗다가 끝부분을 얇게 흘리는 식으로 만들 수 있다. [ㄴ], [ㄷ], [ㄹ]은 일반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중성과 종성을 이을 수 있는 경우엔 잇고 [ㄴ]처럼 지나치게 떨어져 있는 경우엔 얇게 만들어 중성 세로기둥과 연결한다는 규칙이 생겨났다. 답답함을 피하기 위해 연결하지 않고 약간 틈을 두었다.

  ▶︎세로모임꼴: [글], [릉]
  [글]은 원본에 세로모임꼴이 없으므로 새로 만들어야 한다. 초성 [ㄱ]의 꺾임은 각지게 처리할 수 있고 굴려줄 수도 있는데, 여기선 전체적인 테마인 ‘굴림’을 살렸다. 아랫부분에 어차피 굴림이 들어가므로 직각으로 꺾여도 문제는 없다. 종성 [ㄹ]은 [발]에서 가져오되 온자에 맞게 높이를 약간 높였다.

  [릉]의 초성 [ㄹ]은 온자의 중간까지 차지하므로 아랫부분을 굴리기 애매하다. 온자가 한 몸처럼 룩을 형성해야 하므로 [ㄹ]은 시작과 끝을 평평하게 처리했다. 왼쪽·오른쪽 각 모서리는 테마인 굴림에 맞게 원형으로 처리했다. 종성 [ㅇ]은 억지스럽게 닫아주기 보다 위쪽이 열린 원본 느낌을 살려 위쪽이 열린 그대로 가로보에 붙였다. 이는 앞으로 만들 [원]에 모티프를 제공한다.

  ▶︎섞임모임꼴: [의], [원]
  원본에 섞임모임꼴이 없으므로 두 온자 모두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앞서 디자이너가 새로이 만든 규칙이 보조해주기에 백지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쉽다. [의]에서 직선 이음보 [ㅡ]는 온자 내에서 맨 아래에 위치하게 되는데, 그러면 원본 느낌과 배치된다. 이에 아예 아래쪽을 감싸는 느낌으로 중성 기둥과 이어 버리는 방향을 택했다. 고전적인 형태는 아니나, 문자열 내에 유사한 글자가 없어 판독 오류를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초성 [ㅇ]은 평범하게 처리했으며 [ㅇ]과 [ㅢ]가 만나는 부분은 중성 [ㅣ]와 종성 [ㄴ]이 만나는 부분에서 힌트를 얻어 뒤집어서 적용했다.

  이어서 [원]을 만들어 보자. 섞임모임꼴 [ㅝ]에서 [ㅓ]의 가로줄기를 어디 두느냐 하는 문제만 해도 최소 세 가지 옵션이 있다. 이 서체가 본문용이 아닌 디스플레이용에 가까운 만큼, 여기서는 공간 처리에 용이한 줄기를 위쪽에 두는 방법을 택했다. 초성 [ㅇ]은 평범하게 처리하기보다 아래쪽을 열어서 ‘굴림’과 ‘열림’ 이라는 테마를 지켰다. 중성 [ㅝ]와 종성 [ㄴ]이 만나는 부분도 수많은 옵션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이미 만들어 둔 초성 [ㅈ]에서 모티프를 얻어 일체형으로 만들었다. 파도치듯 넘실대는 [ㄴ]이 초성 [ㅇ]과 맞물려 해 뜨는 강릉 바다의 이미지를 전한다. 중성 [ㅜ]와 [ㅓ]가 닿는 부분은 평범하게 마감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장식성이 강한 서체인 만큼 얇은 획으로 연결하는 디테일을 추가했다. 주로 1980년대 제작된 아크릴 간판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이다.



✻                    ✻                    ✻



강릉 구도심을 방문한다면 포남동과 그 일대 아파트 글자도 눈여겨볼 만하다. 강릉 시내는 여느 지방 도시가 그렇듯 지역 군소 건설사가 지은 여러 이름을 지닌 소형 아파트의 천국이다. 각진 고딕이 대부분이나, 본격적인 붓글씨로 된 아파트 글자도 있다. 왕관이나 이니셜 같은 고유 심벌과 결합한 경우도 있다. 모두 소중한 유산들이다. 특히 포남1동에 위치한 목화빌딩(구 목화예식장)은 범상치 않은 외관을 지닌 지역의 랜드마크다. 그럼에도 관련 문헌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 아쉬웠다.

지역 글자를 찾다 보면 건축물에도 점점 주목하게 된다. 글자 만들기와 건축 모두 ‘설계’[중국에서는 디자인을 칭할 때 ‘design’ 못지않게 ‘設計’라는 표현도 흔하게 통용된다.]를 필요로 하며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의 생활을 설계하는 것. 글자와 건축의 공통점 아닐까.


포남동 일대의 아파트들







글을 쓰고, 글씨를 쓰고, 글자를 설계하고 가르치는 등 글자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 관심이 있다. 산돌을 거쳐 ㈜티랩에서 근무 중이다. 월간 『디자인』, 계간 『디자인 평론』 등에 글을 기고했으며 서울시립청소년미디어센터, 온라인 플랫폼 클래스101, 이도타입에서 서체 디자인을 가르쳤다. 에세이집 『글자 속의 우주』를 출간했다. ● ●  @donghoonh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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