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허경미의 열두 페이지 2012.02.16

   수줍음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속내를 펼쳐 보이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그런 이들은 마치 화려하지 않은 표지를 가진 책과 같다. 수수한 겉장을 넘기고, 첫 페이지, 두 페이지, 세 페이지, … 연달아 넘기다 보면, 비로소 깊은 진가가 드러나는 책. 

   일러스트레이터 허경미도 어쩌면 제 안에 두꺼운 책을 숨기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진 찍히는 게 너무 어색해서···”라며 웃는 얼굴에서 쑥스러움 잘 타는 소녀의 모습이 묻어난다. 그런가 하면, 일러스트 작업과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특유의 큰 눈이 초점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상대방을 응시한다. 대화가 계속될수록, 그녀 안의 책장이 한 장씩 넘어가는 듯하다.

   올 1월 홍대앞 동네잡지 『스트리트 H』에서 발간한 아코디언 북(Accordion Book)은 허경미의 일러스트로 채워져 있다. 『홍대앞 매력적인 카페 12곳(12 Fascinating Cafes Around Hongdae)』란 제목의 이 아코디언 북은 총 12페이지로, 홍대 주변 카페 12곳을 본뜬 12컷의 그림들이 각 페이지마다 하나씩 들어가 있다. 이 카페들은 모두 3년 이상 제자리를 지켜온, 홍대 앞 지역문화 커뮤니티의 장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스트리트 H> 발행처인 디자인스튜디오203(대표 장성환)이 직접 엄선한 장소들이기도 하다. 

인터뷰. 임재훈




▲ 『홍대앞 매력적인 카페 12곳』

   홍대앞에 작업실을 둔 허경미는 수시로 12곳의 카페들을 돌아다니며 스케치했고, 손과 연필을 이용해 일러스트를 완성했다. 그녀는 “이번 아코디언 북은 백퍼센트 손작업”이라며 “앞으로도 손과 연필을 사용한 작업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 표현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홍대앞 매력적인 카페 12곳』은 전부 펼쳤을 때 길이가 180cm이다. 허경미의 키보다도 크지만, 평소에는 아담한 크기로 접지되어 있다. 문득, 이 아코디언 북이 그녀와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접히고 접힌 그녀의 숨은 12페이지에는 어떤 키워드들이 담겨 있을까?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수작업이다. 물론 마감에 쫓기며
    외부 일을 하다보면 컴퓨터로 대부분의 작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수작업을 절대 놓지는 않을 거다.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일은
    ‘시간의 압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손은 확실히 컴퓨터에 비해 느리다.
    하지만 시간을 들인다는 건, 그만큼 정성을 들인다는 것. 나는 그 느낌이 좋다.”


▲ 지난해 월간 『빅이슈』에 실렸던 일러스트. 소설가 김연수의 에세이와 함께 게재되었다.


   

   “컴퓨터로 작업하는 경우에도 일단 배경이나 패턴은 무조건 연필로 그려본다.
    연필을 사용하고 있으면, 쌓여 있던 시간들이 모조리 내 손을 타고 흘러 연필심 끝으로 나오는 기분이다.”


   

   “아이디어 스케치는 주로 카페에서 한다.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시간과 내가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좋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창작자들에게도
    카페는 특별한 공간인 것 같다. 글쓰기에 몰두 중인 작가나 번역가 분들을 카페에서 자주 본다.”


▲ 프리미엄 워터를 주제로 한 월간 『ceci』 특집기사 일러스트


   

   “아코디언 북에 실린 어 카페(A Cafe)는 내가 평소에 좋아했던 곳이다.
    특히 노란색 차양이 무척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일러스트로 표현하려고
    세밀히 뜯어보니, 병아리 같은 노란색이 아니라 상아색에 가까운 흐릿한 빛깔이더라.
    창문 모양도 내가 평상시에 무심코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눈으로 본 카페는
    손으로 그려질 때 전혀 다른 느낌이다. 12곳 카페들을 그릴 때 이런 점들을 하나하나 다 헤아렸다.
    카페 한 군데당 세 컷씩 그려본 끝에 완성작이 나올 수 있었다.”


   

   “마감이 임박하면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마감 때에는 커피 타는 시간도 아깝다. 그래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장만했다.
    에스프레소 캡슐만 쏙 넣으면 끝. 시간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잠까지 쫓을 수 있다.
    마감 때는 요 녀석이 정말 효자 노릇을 한다.”


▲ 『스트리트 H』 창간 2주년호 커버 일러스트


   

   “일단 해가 져야 집중이 잘 된다. 밤 10시를 넘어서 이튿날 오전 6시 사이가 프라임 타임이다.
    물론 졸리다. 그래도 이 시간대에 가장 작업이 잘 되더라. 이렇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커피를 달고 산다.
    이상한 습성인 것 같기도 하다···.”


   

   “작업실에서는 오직 작업만 한다. 여가는 집에서만 즐긴다. 내 철칙이다.
    집과 작업실을 분리해놓지 않으면 내가 나를 통제하기 힘들어진다.
    일부러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작업실을 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직장생활을 하면 회사의 타임테이블에 나를 맞추면 되지만, 프리랜서로 일하면
    그런 외부적인 제어 장치가 없다. 그래서 더 스스로에게 엄격해질 수밖에 없다.
    프리랜서이기는 하지만, 출퇴근 개념으로 늘 일하고 있다.”


▲ 홍대앞 예술시장 '프리마켓'을 표현한 일러스트


   

   “일러스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었다. 이걸 하고 있자니 저것도 하고 싶고···.
    뭔가 하나를 진득하게 못 했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가 명확하지 않았던 게다.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내내 마음이 불편했는데, 어느 순간 그냥 욕심을 놔버렸다. ‘반드시 뭔가를 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대로 작업을 했다. 그러다 보니까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게 뭔지 저절로 알게 되더라.”


   

   “며칠씩 밤새워 작업한 그림이 인쇄물로 나왔을 때. 그걸 손으로 받아 볼 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본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그 기쁨 못지않게 밤을 지샌 뒤 입는
    데미지가 커지고 있다···. 체력이 달린다···.”


▲ 시사 주간지 『시사저널』 일러스트. 
    [위] '증권회사 직원의 사기행각' / [아래] '부채에 눌린 대한민국, 우리 엄마 아빠는 빚쟁이'


   

   “일러스트 자체가 감성에 호소하는 장르 아닌가.
    당연히 사람들의 삶을 알아야 좋은 그림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맛있는 그림』이나
    『수치심의 역사』, 『돈가스의 탄생』처럼 문화와 역사가 결합된 인문학 서적을 좋아한다.
    문화와 역사는 삶에 관한 주제이다. 여러 가지 형태의 삶을 알면,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창작의도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내 작품을 봐줄 사람들까지 염두에 두게 된다.”


   

   “우표 수집을 좋아한다. 관상용으로 모으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인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선물을 전할 때 사용한다.
    우표는 참 재미있는 소품이다. 판화의 소규모 버전이랄까?
    잉크가 찍힌 압력, 새겨진 그림, 종이 모양 등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 [위] 연희동 지도 / [아래] 부암동 사거리 지도


   

   “작업이 지지부진할 때가 있다. 그러면 의기소침해진다. 의욕도 사라지고.
    그런 순간 스스로 되뇌는 생각이 있다. ‘네가 이 상태로 작업을 마무리한다면,
    분명히 완성물을 보고 후회하게 된다. 나중에 쪽팔리지 않으려면 당장 정신 차려!’
    사람들이 졸릴 때 잠 깨려고 자기 볼을 꼬집듯이, 나도 나태해질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의식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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